글로벌경제신문

2019.08.2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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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곤 前 국민일보 주필


전장에서 세우는 혁혁한 전공은 훗날 오히려 자신을 겨누는 칼이 된다. 한신은 유방의 한(漢)제국 건설에 있어 최고 공로자였다. 고조에게 위협적 존재가 된 그는 결국 체포됐다. 한신이 탄식하며 말했다.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창고에 처박힌다, 그리고 적을 깨뜨린 후엔 지모가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된 지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겠지!”(사마천, 사기 회음후 열전, 김원중 역)

의혹만으로 짓밟힌 대장 계급장

물론 왕조시대의 경우이지만 민주국가에서라고 군대를 지휘할 전장(戰場)이 없는 장군의 처지가 편할 리는 없다. 인사권자의 눈치를 봐야 하고, 때론 무시·조롱·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더 심하게는 정권의 군 장악을 위한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우리 장군들 이야기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역사의 경험으로 미루어 일반론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박찬주 전 2작전사령관의 ‘갑질 사건’은 어떨까? 40년 넘는 세월을 군에서 보내며 대장 계급장까지 달았다. 그런데 재작년 7월 31일 군인권센터라는 단체가 갑질 의혹을 제기했다. 부부가 함께 공관병에게 갖가지 가혹행위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즉각 전역 지원서를 제출(8월 1일)했으나 수사대상자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육군 인사사령부 정책연수 발령을 받았다. 언론은 연일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그들 부부에겐 새디스트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섰다. 그는 그달 7일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국방부가 시행하는 전수조사는 문제해결을 위한 시작일 뿐”이라며 그 사건을 계기로 전 부처 차원의 ‘갑질 실태’를 점검하고 근절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박 대장에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갑질 혐의 입증이 어렵자 군 검찰은 별건수사로 뇌물수수혐의를 찾아냈다. 이로 인해 국방부 헌병대 영창에서 사병들과 함께 3개월을 갇혀 지냈다. 대법원이 그해 12월, 그가 8월에 전역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는 일반법원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국가권력에 의해 린치당한 기분”

1심(작년 9월 14일)에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을, 항소심(지난 4월 26일)에서 뇌물혐의 무죄선고를 받았다. 다만 부하 중령의 보직청탁을 들어준 것과 관련해서는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벌금 400만원이 선고됐다. 박 전 대장은 재판이 끝난 후 “국가권력에 의해 린치를 당한 기분”이라고 했다는 보도다.

황당한 누명이었다. 도대체 뭘 위해서, 가장 큰 영예를 안아야 할 육군대장을, 대통령까지 가세해서 그 지경으로 몰아갔다는 것인가. 군 검찰은 기어이 그를 징벌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삶 전체를 뒤졌을 것이다. 장군에게 이런 모욕과 고통을 안기면서 우리 군이 긍지를 가지고 국가수호의 책무를 다하리라고 기대한다? 바랄 걸 바라야지!

아마 박 장군을 모욕과 수치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사람들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 탓을 해야 하는가. 무슨 이런 법이 다 있는지 남의 일이라도 기가 막힌다.

옛날 얘기 하나 더 하자. 1170년(고려 의종 24) 왕의 보현원 행차 도중 오병수박희(五兵手博戱)가 열렸다. 호종하던 대장군 이소응이 나섰다가 지자 문신 한뢰가 뺨을 때리며 조롱했다. 격분한 정중부 등은 보현원에 도착하자마자 승선 임종식, 지어사대사 이복기, 기거주 한뢰를 비롯 문신들 모두를 살해하고 환궁해서 다시 문신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로써 고려 무신정치가 시작됐다.

지금이야 그런 시절이 아니지만 군을 모욕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것만큼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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