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경제신문

2019.06.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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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곤 前 국민일보 주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8년 6월 12일, 당시 한창 달아오르던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8주년 기념 특별강연과 만찬’에서 “20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 민주주의 이래 처음으로 수천만 국민의 참여와 관심 속에 한국에서 다시 그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대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이 말한 바와 같이 그 형태는 ‘직접민주주의’였다. 시민들이 민회(에클레시아)에 참석해서 주요 국정사항을 직접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시민’은 전체 인구의 8분의 1, 그러니까 12~13%에 불과했다. 여성, 미성년자, 노예, 외국인 등은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폭민정치 위험성 지금도 있다.

게다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가 늘 아름다운 모습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선동이 있었고, 군중심리에 휘둘린 민회의 시민들이 참으로 엉뚱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최근의 특징적 정치현상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포퓰리즘이 그 때에도 성행했던 것이다. 정치개혁의 산물로서 대표적이었던 도편추방제가 70년 만에 사라지고 만 게 그 때문이었다.

포퓰리즘, 즉 대중주의의 ‘대중’은 흩어져 있는 개개인의 집합적 의미가 아니라 ‘군집한 대중’에 가깝다. 그러니까 군중주의라는 게 더 옳을 수 있다. 군집한 대중은 아테네에서조차도 군중심리에 휩쓸리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격정적인 집합체로 전락하곤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테네의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중우정치(mobocracy)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도 낫게 평가해 준 편이지만 썩 좋은 점수를 주지는 않았다. 폭민정치(ochlocracy)로 타락하기 쉽다고 봤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또 다른 군중과 광장이 있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네티즌들과 그들이 모여드는 사이버공간이다. 이들의 성향은 현실의 광장에 모인 군중보다 더 과격하고 편향적이고 획일적이다. 얼굴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공간은 우리가 목격하는 바와 같이 욕설과 악담과 저주와 증오가 넘쳐나는 선동의 광장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아주 크다.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입법‧사법‧행정 3권이 분립된 권력구조를 갖고 있다. 대통령은 자신이 관할하는 분야에서만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문고로도 부족해서 청원을 들어주는 코너까지 만들었다. 임금 흉내는 내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작용은 반작용을 부르게 마련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들이 들어줄 청원은 거의 없다. 청원‧제안자들도 그걸 잘 안다. 그래서 감정의 하수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나 정치세력을 공격하고 조롱하고 망신 주는 수단으로는 제격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최근에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게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과 그에 대한 맞불 성격의 ‘민주당 해산 청원’이다. 청와대에 청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청원 혹은 제안을 다 올리게 하고 동의자 수를 실시간으로 밝혔다. 지난 2월엔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한 2심 재판장을 파면하라는 청원 추천이 20만 건을 넘자, 청와대는 관련 내용과 답변을 이승련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에게 전달했었다. 정당들에도 결과를 전달할 생각일까?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물리학적으로 그 힘의 크기는 동일하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 탄핵 청원이 시작됐다. 지난달 30일부터 청와대 홈페이지에 오른 이 청원이 7일 밤 12 현재 10만 746명의 추천‧동의를 받고 있다. 20만 명이 넘을 경우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철학을 지향한다’는 청와대가 어떤 답을 내놓을까?

군중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군중의 심리와 행동은 대단히 가변적이다. 사이버 공간의 군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다. 기류가 바뀌면 공격 목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이전에, 국민청원 및 제안 코너는 청와대의 월권이다. 꼭 코너를 유지하고 싶으면 그 범위를 명확히 고지하고, 청와대와 행정부 해당 사항이 아닌 것은 아예 올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청와대가 국민 상호간의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는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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