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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페테르크부르크(5) 표트로 대제의 개혁과 저항

승인 2019-08-22 1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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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709년 6월27일 폴타바 전투에서 승기(勝機)를 잡은 표트르 대제(1672~1725)는 그해 가을에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 땅을 빼앗았다. 1714년에는 스웨덴 함대를 격파했으며,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위협했다.

1714년 11월에 카를12세는 스웨덴으로 귀환했다. 그는 전열을 가다듬고 병력을 6만 명으로 증강했다. 그런데 카를12세는 1718년 11월에 전방을 시찰하던 중 총에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카를 12세가 죽자 표트르 대제는 여세를 몰아 스웨덴을 공격했다. 1719년에는 스톡홀름 가까이까지 진격하자 서유럽 열강들은 러시아가 지나치게 큰 힘을 갖는 것을 견제하고 나섰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명실 공히 ‘유럽으로 향한 창’이 되었다. 표트르는 ‘서유럽을 배우자’라는 기치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강한 군대와 서유럽의 문화와 이성적 사고를 배워 러시아를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1711년에 표트르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 '베도모스티'를 발행하였고, 그가 직접 편집을 맡기도 했다. 또한 복잡한 키릴문자를 간결하고 쉬운 문자로 바꾸었다. 1715년에는 해군사관학교, 1721년에는 포병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수많은 관공서와 학교와 학술원, 박물관, 공원, 극장 등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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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강에서 바라 본 상트페테르크부르크 강변 전경. 사진=김세곤


그런데 개혁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1718년 6월 26일에 표트르의 첫째황후 예브도키아에게서 태어난 왕세자 알렉세이(1690~1718)가 페트로파블롭스키 감옥에서 갑자기 죽었다.

알렉세이 왕세자가 왜 갑자기 죽은 것일까?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왕세자 수업을 가혹하게 강요했다. 알렉세이는 이에 반발하면서 반(反)표트르파와 유착했다.

지나친 개혁에 반발한 귀족과 종교 세력들은 표트르를 암살하려 했는데 여기에 알렉세이도 관련되었다. 알렉세이는 암살 계획이 발각되자 자기의 동서 카를 6세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도망갔다. 표트르는 알렉세이를 용서하겠다면서 설득했고, 알렉세이는 1718년 1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2월3일에 표트르는 알렉세이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다. 6월에 알렉세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서 재판을 받았는데 6월24일에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지만 실제로는 심한 고문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719년 즈음에는 표트르가 구축한 해군은 ‘해상의 왕자’ 영국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드디어 1721년 9월10일에 러시아와 스웨덴은 핀란드 니스타드에서 1700년부터 시작된 21년간의 전쟁이 종결시키는 ‘니스타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패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고, 러시아가 강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는 리가에서 비보르크까지 발트 해 연안을 손에 넣었고, 에스토니아·리보니아 및 카렐리아의 일부 영토를 차지했다. 이런 업적으로 1721년 10월22일에 원로원은 표트르에게 임페라토르(황제)라는 칭호를 바쳤다.

하지만 이 무렵 표트르 대제는 요독증에 시달렸고 알콜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장거리 항해를 떠나 술자리를 즐기는 바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되었다.

172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트 사고가 발생했다. 표트르는 차가운 물속에 직접 뛰어 들어가 익사 직전의 승무원들을 구하려 했다. 그 결과 그는 폐렴에 걸려 1725년 2월8일에 사망했다. 신식 궁정복장을 한 그의 유해는 30일간 겨울궁전에 안치된 후에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에 묻혔다. 러시아를 변혁시킨 위대한 지도자 표트르 대제는 이렇게 세상과 하직했다.

표트르가 죽은 후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1727)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첫 번째 부인 예브도키아는 성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황후에서 폐위되고 수도원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예카테리나 1세는 원래 라트비아 농부의 딸인데 스웨덴과의 전쟁 때 포로가 되었다. 그녀는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표트르는 그녀의 미모와 순종에 반하여 1712년 2월에 황후로 삼았고 겨울궁전에서 성대한 결혼 피로연을 열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 1세는 그녀의 정부(情夫) 멘시코프에게 권력을 맡기고 향락에 빠져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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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궁전(왼쪽 에메랄드 색 건물). 사진=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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