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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크부르크(23) 에르미타시 박물관(17)-고독한 자아(自我), 렘브란트 -

승인 2020-01-13 18: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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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돌아온 탕자’ 그림 앞에서 렘브란트(1606~1669)의 생애를 되씹어 본다. 그의 인생은 1642년에 아내 사스키아와 사별한 후부터 꼬였다. 그는 9개월 된 아들 티투스를 양육하기 위해 농부의 아내였던 과부 헤이처 드릭스를 유모 겸 가정부로 고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렘브란트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그런데 1647년에 헨드리케 스토헬스가 티투스의 가정교사로 들어오면서 헤이처와의 관계는 끝났다.

1649년에 헤이처는 결혼약속위반으로 렘브란트에게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렘브란트에게 매년 2000 길더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자 렘브란트도 헤이처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자 수감원으로 보냈다.

한편 헨드리케는 1654년에 딸을 낳았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에 헨드리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사스키아는 그가 재혼하면 4만 길더나 되는 유산을 행사할 수 없도록 유언장에 적었다. 당시 렘브란트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너무 많아 사스키아의 유산을 포기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654년 6월에 헨드리케는 개혁교회 평의회에 나가 매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은 렘브란트와 헨드리케의 동거를 극히 불온한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주요 고객들을 잃었고 더욱 곤궁해졌다.

이즈음 렘브란트는 헨드리케를 모델로 하여 그림 세 점을 그렸다.

첫째는 ‘플로라 옷차림의 헨드리케’이다. 렘브란트는 ‘플로라 옷차림의 사스키아(1634년)’도 그린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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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라 옷차림의 헨드리케. 사진=김세곤 제공


둘째는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이다. 런던 내셔날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한 여인이 속옷의 말단을 걷어 올리고 냇가로 걸어들어간다. 엷은 미소는 장차 있을 목욕의 즐거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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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 사진=김세곤 제공


셋째는 ‘다윗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이다.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는 다윗의 편지를 받고 당혹한 표정이다. 그녀는 이미 우리아 장군과 결혼한 몸이었는다. 그림은 향후 진행될 후반부를 예고하고 있다. 소위 ‘탈맥락화’이다. 나중에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전사하게 만들고, 밧세바는 솔로몬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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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김세곤 제공


한편 1656년에 렘브란트는 파산 선고를 당했고 1658년에는 저택이 헐값에 경매되자 빈민가로 이사했다. 1663년에 사랑하는 여인 헨드리케가 죽었다. 헌신적인 여인 헨트리케를 잃은 렘브란트는 좌절했다. 1664년에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을 그렸다. 로마의 정숙한 부인 루크레티아는 그녀를 탐낸 귀족의 모함에 빠져 몸을 망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루크레티아는 헨드리케의 모습이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추모한 것이다. (로베르타 다다 지음 · 이종인 옮김, 렘브란트, 예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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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의 자살 (미국 워싱톤 국립미술관) 사진=김세곤 제공

1666년에도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을 그렸는데 단도로 자신을 찌른 후의 모습이다. 흰 옷에 피가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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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의 자살 (미국 미니어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사진=김세곤 제공


1667년에 렘브란트는 유대인 신부(이사악과 리브가)를 그렸다. 이 그림도 아들 부부를 모델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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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신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 사진=김세곤 제공

1668년 2월에 외아들 티투스는 사스키아의 조카인 막달레나 반 로(Loo)와 결혼했다. 결혼 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티투스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는 좌절했다. 1669년 3월 렘브란트는 손녀딸의 세례식에 참석했다. 이 불행한 아이는 곧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겪었다.

‘자화상’이란 용어도 없던 시대에 렘브란트는 유화 40여점, 동판화 3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말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면 렘브란트의 궁핍과 초라함을 금방 알 수 있다. 빈민가에서의 생활, 그리고 식사는 빵과 치즈 ,절인 청어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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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로 분장한 자화상 (1661년 작,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사진=김세곤 제공


1669년 10월4일에 렘브란트는 63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젤에는 ‘아기 그리스도를 안은 시몬’이 미완성인 채로 걸려 있었다. 유족이라곤 15세의 딸과 1살도 채 안된 손녀뿐이었다. 10월8일에 렘브란트는 조문객 없이 암스테르담의 서쪽 베스테르케르크 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2019년은 렘브란트 서거 350주년이었다. ‘고독한 자아(自我)’ 렘브란트는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제 에르미타시 박물관을 나온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관에 있는 인상파 · 입체파의 그림들을 못 본 점이다. 르누아르 · 고호 · 고갱 · 피카소 · 마티스의 그림들 말이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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