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前)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前)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는 것이 두려워요

직장에서 퇴근하면 텔레비전부터 켠다. 오후 7시쯤 집에 들어오면 12시가 넘도록 채널만 돌린다. 어떻게 보면 이게 나의 유일한 휴식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회사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는 무기력하게 텔레비전 앞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집안일도 거의 하지 않는다. 아내가 쓰레기통 한번 비워달라고 해도 그것이 귀찮다. 술과 담배도 안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싫다. 친구들과 연락도 잘 하지 않고 그냥 혼자서 지낸다. 

퇴직이 몇 년 남지 않았다. 지금이야 직장이라도 나가지만 퇴직하고 나서가 걱정이다. 텔레비전 하나로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그냥 놀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진지한 여가를 즐겨라

쉴 틈 없이 일만하는 직장인들은 취미와 여가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다. 시간 여유도 없지만 마음의 여유가 더 없다. 고된 일로 몸은 지쳐 피곤하니 퇴근 후에는 그냥 소파에 의지한다. 그러다보니 텔레비전 시청은 자연스럽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다. 오래 하다보면 이것이 습관이 된다.

현직에 있을 때는 이런 일상도 견딜만하다. 아침에 눈뜨면 또 직장으로 달려갈 수 있으니까. 문제는 은퇴하고 난 뒤다. 하는 일도 없는데 운동도 싫고 친구도 안 만나면 어떻게 세월을 보낼까?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계속 텔레비전만 볼 수 있을까? 24시간 계속 돌아가는 채널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힘 든다.

사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여가생활이 아니다. 여가란 무엇을 하고 남는 시간 아닌가. 이 경우에는 텔레비전 보는 것 자체가 일이다. 돈 버는 것만 일이 아니다. 아마 직장생활 할 때의 일보다 더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른다. 

현직에 있을 때 일과 여가의 균형이 필요하듯이 은퇴 후에도 마찬가지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여가활동을 위해서는 먼저 ‘의미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돈 버는 일도 좋지만 자기 마음을 채우거나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이 은퇴 후에는 더 어울린다. 

자! 이제 은퇴 후에 해야 할 일과 여가활동을 준비하자. 퇴직 후에 할일이 그냥 생길 리도 없고, 노는 것 하나도 배우고 익혀두지 않으면 잘 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 취업 준비한 만큼이나 은퇴 후의 일과 여가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어찌하겠는가?

“인생 뭐 있어, 그냥 살면 되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내기에는 여생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 일 없는 노년은 자기 정체감의 위기와 우울증을 불러온다. 그러니 놀고 쉬지만 말고 일도 해야 한다. 다만, 현직일 때는 일이 기본이고 여가가 곁 딸려 있지만, 은퇴 후에는 일보다 여가활동의 비중이 높아질 수 있다. ‘일하고 놀고 쉬고’보다 ‘놀고 쉬고 일하고’의 순서가 더 자연스럽다.

노년에는 여가활동의 의미도 좀 바꾸는 게 좋겠다.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놀이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말이다. 은퇴 후의 삶에서 여가활동이 주는 기쁨과 의미는 중요하다. ‘가벼운 여가’보다 ‘진지한 여가’를 즐겨라. 진지한 여가란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자아실현, 자기만족, 성취감 등이 곁들여지는 것이다. 진지한 여가활동은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일로서 의미도 있다.

은퇴 후 딱히 갈 곳도 없고, 잘할 수 있는 취미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면 큰일이다. 어쩔 수 없다고? 세상은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데도 조금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이참에 잘됐다 바빠서 못했는데, 라고 생각하면 하고 싶은 것들이 막 떠오를 지도 모른다. 직장도 안 나가고 의무감도 줄었는데 못할 게 무엇인가. 

여유로운 노년에는 무위(無爲)가 어울린다. 무위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노년에는 일이든 놀이든 억지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이 노년에 어울린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을 일으켜라! 그러면 노년의 여생은 좋은 것을 즐기느라 충만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