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前)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前)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언제쯤에나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일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내보는 것이 소원이다. 현실생활의 이기적인 아귀다툼을 떠나 좀 편하게 지내고 싶다. 그래서 은퇴를 생각하고 있지만, 또 다른 걱정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직장의 일과 성취는 내 존재의 의미였다. 이것 없이도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퇴 후 생활비 걱정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은퇴는 하고 싶지만 앞날에 대한 불안에 걱정이 앞선다.

내게 놀고 쉴 자유라는 게 올 수 있기나 할까? 경제적 자유, 자식으로부터 자유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과연 나는 언제쯤에나 일에서 손을 떼고 은퇴할 수 있을까? 갯벌을 힘들게 기어 나가듯 은퇴를 향한 발길이 느려진다.

카이로스의 시간…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은퇴를 결단해야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구약성경인 전도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 은퇴를 하는 경우에도 왜 때가 없겠는가.

희랍어에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낱말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시계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무언가 중요한 일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비록 찰라 일지라도 구체적 사건 속에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은퇴의 시간에도 두 종류가 있다. 정년퇴직과 같이 물리적으로 시간이 흘러 은퇴하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인생에서 참 시간을 갖기 위해 스스로 의도를 갖고 은퇴하는 때인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진정한 은퇴란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카이로스의 은퇴’를 결단해야 할 때는 언제인가?

경제적 문제 등으로 계속 노동을 해야 한다면 아직 은퇴의 시간이 오지 않았다. 경제적 문제가 모두 준비됐다고 은퇴의 시간이 온 것도 아니다. 진정한 은퇴를 위해서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 정신적 문제다.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노년기의 새로운 삶을 일러주는 다음과 같은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카이로스의 은퇴’를 결심할 때다.

- 이젠 ‘누구의 나’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겠다.
- 이제 성장과 자유가 내 삶의 새로운 가치다.
- 지금부터 내 삶의 모든 몸짓은 행복을 향한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은퇴를 해도 좋다. 진정한 은퇴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은퇴는 막막하고 불안한 게 아니고 슬픔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젠 젊었을 때처럼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버둥대는 삶은 던져버려라. 삶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함께 인생의 새 국면을 맞이하자.

은퇴는 인생에 대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삶이 아니다. 되는대로 내맡기는 체념도 아니다. 진정한 은퇴의 삶은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노자에게서 배워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노자라고 하면 하는 일 없이 숨어사는 ‘은둔적 사상가’라는 그릇된 인상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깊은 고요함 속에서 더욱 큰 행위에 대한 의욕이 솟아난다.

노자의 도는 바로 자연법칙이다. 사람이 거대한 자연법칙을 깨닫게 된 때 자연히 그 법칙을 운영하려는 의욕이 생긴다. 은퇴와 함께 ‘도의 경지’로 나가보면 어떨까. 노자는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자유자재의 인간상을 강조했다.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하는 것, 즉 ‘무위(無爲)’가 진정 은퇴생활에 어울린다. 한 것도 없이 자랑질만 해대지 말고 참됨을 지키고 순박한 삶으로 돌아가자.

은퇴하는데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성장과 자유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오직 진실의 순간만이 중요하다. 진정한 은퇴! 인생의 마루터기에 올라서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본다. 삶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평온해진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노년의 삶과 사랑과 열정에 대하여…

“놀 자유, 쉴 자유, 그리고 일할 자유!”
진정한 은퇴는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