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수필 부문 당선자인 김인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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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경제 정병휘 기자] 가을의 공기

감나무 잎이 반짝인다. 산들바람에 밀린 물결처럼 맑고, 투명하고, 경쾌하게 반짝인다. 그러나 그 빛은 예전의 빛이 아니다. 울긋불긋 번진 버짐에 세월의 인고가 묻어있다. 문득 애잔한 기분이 든다. 참고 견뎌온 세월이 왜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 인생의 끝은 결국 회한인가? 그냥 스치는 감정이고 싶다. 감나무 잎 너머로 푸른빛인가, 노란빛인가? 어쩐지 연둣빛 같기도 한 들판이 외딴 섬의 철 지난 모래밭처럼 고요하다.

빈 조각배처럼 흐르는 실구름에 하늘은 강이 되어 파란 물결을 살랑거린다. 하늘에 높이 나르는 잠자리들이 호수 속 피라미 떼들의 해맑은 유희처럼 경쾌하게 움직인다. 하늘이 호수인가 호수가 하늘인가.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밝은 시공간에서 빙빙 도는 듯하다.

푸른 산맥은 행복한 아버지처럼 누워 미소를 짓는데, 그 품에서 문득 산골학교의 풍금 소리 같은 산비둘기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서너 번 울려오는 소리. 그러다가 어느새 고요한 정적이 감돈다. 마치 단잠 속에 빠져든 듯하다. 그러나 마음속의 울림이 멈추지 않는다. 먼 산기슭을 바라본다. 하지만, 산맥은 어느새 졸음에 빠져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채 그대로 잠들곤 하시던 나의 태평한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늘 그러셨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사랑의 손길로 편안하게 눕혀지고 이불이 덥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진 못했다. 오직 눈물과 눈물만을 건네준 채 떠나가 버렸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삶과 죽음이 사랑을 감추는 동안 아련한 추억이 밀려온다. 연민인 듯 슬픔이 슬쩍 몰려왔지만 이내 사라져 버린다. 맑고 밝은 햇살에 쫒긴 듯하다.

환한 지평선을 향해 사색의 정혼이 몸을 일으키고, 기척이 사라진 산비둘기 소리의 여운을 따라 마음이 움직인다. 몸을 일으켜 산책을 나선다. 차는 가벼운 날개와 같이 달려 고요한 산 어귀의 들판에 입성한다. 산비둘기 소리는 저만치서 들렸지. 지금쯤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궁금증은 그리움 속에도 들어 있는 것. 그리움 마냥 아련히 푸른 산맥을 훑어본다.

잎사귀마다 반짝이는 빛. 때로는 하얗게 느껴지고, 때로는 노랗게 느껴지는 환한 열매가 무수히 달린 듯하다. 그 때문에 산맥의 어느 곳도 우중충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찬란하여 이 지상의 모든 혼을 앗아 한 점의 유적도 없는 천연의 대지에 뿌린다. 자꾸만 멍해지는 것이 이상하다. 햇살에 사라진 안개와 같이 나 자신이 망각처럼 녹아 영영 사라져버린 듯하다. 돌아올 길이나 알고 사라진 것도 아니다. 나도 몰래, 내 존재에 대한 느낌이 없을 뿐이다. 한 마리의 백로가 날아가기 전까지는.

백로는 그믐달 같이 곱고도 느린 몸짓으로 하얗게 날아간다. 유난히 희어 시야가 제아무리 흐려 있고 정신이 제아무리 혼몽할지라도 반짝 깨어나 새로운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저 선명한 순결은 도대체 누구의 선물일까? 푸른 배경이 좀처럼 그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끝끝내 흰 포물선 한줄기를 그으며 언덕 뒤로 사라진다. 단지 그렇게 보았을 뿐인데 갑자기 텅 빈 허공이 열린다. 푸르거나, 파랗거나, 노란 색채가 있어도 환형처럼 뚫리고, 모든 생기가 예견된 이별처럼 사라진다.

그렇던가! 매년 지우고 또 지워왔어도 끝끝내 지울 수 없는 가을의 우수였던가! 불현듯 허전해지는 마음. 7월의 치자꽃 향기처럼 퍼지던 연인의 입김이 사라져버렸던 때와 같다. 정열이 빠져나가 버린 허무가 심장을 스친다. 길 잃고 방황하지는 않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길을 떠나는 듯하다.

가벼운 듯, 무거운 듯. 가까운 듯, 먼 듯. 옅은 듯, 깊은 듯.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기가 있다. 황혼의 기품도 그러하고,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한 회색빛 자욱한 하늘의 기품도 그러하고, 고요한 달빛 서린 아스라한 지평의 기품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은 혼의 정성을 담아 세밀한 붓으로 캔버스에 칠해질 수도 있고, 팽팽하게 긴장된 현으로 탄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을의 공기는 오히려 붓을 앗아가고, 현을 앗아가는 미지의 꿈. 어떤 혼의 정성으로도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돌아오는 것인가, 사라져가는 것인가? 대답은 명백하다. 돌아오는 그리움도 밀려가 버리고, 머물러 있는 기다림도 밀려가 버리는 망각의 넋! 아름다운 육체를 다시금 드러낼 수 없는 심해 속으로 아득히 가라앉는 사랑의 주검, 그것은 썩어가는 죽음이 아닌 사라져가는 죽음! 가을의 공기는 그렇게 투명한 눈을 뜨고 있다.



정병휘 글로벌경제신문 기자 news@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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