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수필 부문 당선자인 박 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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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휘 기자] 숲의 배웅

하늘이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하늘의 발끝이 가 닿은 이천변 물살 위로, 늦여름 후텁지근한 바람이 성밖숲길로 접어들었다. 구름에 잠긴 햇살은 어느새 붉은 입술을 터트리며 노쇠한 왕 버드나무 가지마다 이별 인사를 전했다. 나는 천천히 그 인사를 배웅하러 다가섰다. 55-36. 왕버드나무. 500년의 세월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그 가벼운 이름표가 이상하게 묵직한 존재감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발아래 막 여물기 시작한 맥문동 보랏빛 꽃잎들이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래 오래 놓지 못했다.

그녀의 첫 인상이 꼭 그랬다. 또래보다 한 뼘 이상 큰 키는, 멀리서 보면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는 버드나무처럼 가벼워보였지만, 막상 코앞에서 보면 꽉 다문 입술에 그려진 야무짐과 묘한 존재감으로 그녀만의 아우라를 풍겼다. 낯선 서울로 대학을 와서 낯선 공간에 버려진 아이처럼 허둥대는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던 그녀였다. 왕버드나무의 가지처럼 긴 팔을 한껏 뻗어서 매일매일 반갑게 안아주고 인사해주는 그 범상치 않은 붙임성에 위로받으며 나는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옆에서 하숙을 하던 그녀는 항상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뛰어가 내 자리를 맡아주었고,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영화를 보고, 햇살이 번지는 오후엔 빈 강의실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주로 고향 성주와 성밖숲 얘기를 많이 했다. 왕 버드나무에 얽힌 전설이며, 그 곳으로 소풍간 추억이며, 첫사랑과 이천변을 함께 걸으며 설렜던 그 밤의 별빛 가득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어느새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 숲에 서 있곤 했다. 그리고 우린 언젠가는 그 숲을 함께 거닐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봄이 가고 여름의 뜨거움이 가라앉고 가을마저 시들해질 무렵, 그녀는 더 이상 그 숲 얘기도 버드나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물론 도서관에도, 강의실에도, 학교 식당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80년대 말, 그녀는 교문 앞 백골단과 대치하고 선 시위대 속에서 주먹을 불끈 취고 투쟁했고, 최루탄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코를 막으며 달아나는 모습으로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겨울의 끝, 알바를 하고 돌아오던 나는, 내 자취방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녀와 마주했다. 라면에 계란 하나 풀어서 끓여달라며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물을 올리고 삼양라면 한 귀퉁이를 분질러 넣으며,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라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와 함께 수다를 떨고 성밖숲 왕버드나무의 전설에 신기해하던 내가, 수다 대신 민주를 외치고, 전설 대신 현실을 깨부수려는 그녀에게 차마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다른 말이었다. 비록 깨지고 무너지더라도 꼭 수 천, 수만 개의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라는 격려의 다른 말이었다.

니 그거 아나? 버드나무 꽃말?

라면을 후르르 마시다가 문득 그녀가 물었을 때, 갑자기 무슨? 하는 표정으로 생뚱맞게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땐 그 꽃말을 몰랐다. 그녀가 다시 사라지고, 전대협 발대식에 갔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최루탄 냄새에 콧물을 흘리며 도서관 구석에서 공부를 했고,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종적을 감췄다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취업준비로 바빴고, 그녀가 구로공단 어딘가에 위장취업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의 강이 지나갔다. 동문들 사이에서 그녀가 암투병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 게 2년 전이었다. 나는 그녀가 궁금했지만 왠지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녀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밖숲은 너무도 생생하게 내 꿈길에 서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나는 종일 심란했다. 때마침 친정아버지가 큰 수술을 하게 되어, 며칠 부산에서 병간호를 하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3아들 걱정에 새벽 일찍 고속도로를 달리다, 문득 안개 속에 누군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게 보였다. 그녀였다. 깜짝 놀라 갓길에 급히 차를 세우고 다시 쳐다보았을 때,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나는 한참이나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보듬고 있다가, 그 길로 핸들을 돌려 그녀가 입원해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딸이 안내해 준 곳엔, 이제 치료도 포기한 채 하루하루 연명치료만 하고 있다는 그녀가 누워 있었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스무 살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함께 성밖숲에 가야지. 그 말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지만, 반응이 없었다. 침상 한편에 놓여있는 사진 속엔, 항암치료로 다 빠져버린 머리를 모자 속에 감춘 채, 55-36 버드나무의 품 앞에서 해사하게 웃는 그녀가 있었다. 그 미소가 떨어지는 곳마다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는 맥문동 꽃잎이 눈부셨다. 그렇게 그녀는 6개월 뒤 소풍을 떠났다.

니 그거 아나? 버드나무 꽃말?

그녀의 발인을 끝내고 다시 성밖숲을 찾았을 때, 문득 오래전 그녀의 그 말이 떠올랐다.

자유.

뒤늦은 대답을 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못 깨는 한이 있더라도 신념대로 살고 싶었던 그녀에게, 풍족하고 따뜻한 창가자리보다 고단하고 차가운 냉돌 아래를 선택했던 그녀에게, 그 아름답던 스무 살 그녀에게, 나는 다만 이제는 자유롭게 버드나무 홀씨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또다시 새로운 곳에서 실컷 소풍하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돌아오는 길,

어두워진 성밖숲 허궁 위로 훨훨 날아오르는 그 무언가가 풍선처럼 내내 나를 배웅했다.



정병휘 기자 news@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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