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수필 부문 당선자인 이은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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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휘 기자] 마중물

윤슬에 일렁이는 호수가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저수지 건너편 미루나무 우듬지가 햇살의 형형함을 껴안았다. 참새 떼들이 물가에 앉아 수런거리다 포르르 날아간다. 시골에 전원주택을 지어 이사를 간 친구 집에 들렀다. 예쁜 카페처럼 운치가 있었다. 물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하늘이 반영된 호수의 물이 연한 옥빛으로 물들었다. 솜사탕처럼 엉켜 있는 뭉게구름도 오롯이 물의 표면에 앉았다. 한가로운 여유에 소소한 행복이 스며든다.

청정한 공기에 이끌려 느긋하게 걸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마을 한가운데 밤나무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우물이 우뚝 서 있고, 둥근 빨랫돌이 망부석처럼 웅그리고 있다. 예전에 우물가에서 손빨래하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옛 추억이 서린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는 돌로 층층이 벽을 쌓아 견고하게 보인다. 우물 스스로 만들어 낸 그늘로 물이 거뭇거뭇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우물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옅은 그늘 사이로 보이는 구름 떼의 하얀 얼굴도 변함이 없었다.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크고 무성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옆에는 둥근 우물과 두레박이 있었고, 은색 펌프도 설치되어 있었다. 두레박으로 물 긷기는 힘들어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올린다. 깊숙이 가라앉은 물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펌프로 물을 끌어 올리려면 고무 막이 구멍을 빈틈없이 막아야 한다. 이럴 때 약간의 물을 펌프에 넣어 주고 작동하면 지하수 물이 시원하게 흘러나온다. 이때 부어주는 한 바가지의 물이 바로 마중물이다. 풍부한 지하수 물이지만 어머니는 한 방울의 물도 낭비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무더위에 지쳐 집으로 오면, 마중물로 끌어올린 우물에서 등목부터 시원하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빨래도 우물가에서 한다. 빨래의 마지막 헹군 물은 발을 씻거나 걸레를 빤다. 그 과정을 거치고 맨 마지막에는 꼭 나비물로 활용한다.

마중물은 손님이 오면 주인이 반갑게 마중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정 많고 따뜻한 우리네 정서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말이다. 이름처럼 작은 생명수 역할을 한다. 한 바가지의 작은 물이지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슴에 새겨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도 꼭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다는 교훈으로 남았다. 그리고 조상의 지혜가 느껴진다. 늘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햇살 한 번 볼 수 없는 지하수를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땡볕이 내리쬐는 기와에 앉은 능소화처럼 손끝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향하여 뻗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자연의 강인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펌프질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붉은 녹물이 나오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투명한 물이 나온다. 기다리는 인내와 비움의 미학까지 가르쳐준다. 나에게는 단비 같은 마중물이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힘이 빠질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외롭고 삶이 버거울 때 끌어당겨 주고,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준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 라고 한다. 그만큼 삶이 험난한 길이라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가시밭길을 잘 헤쳐 나가야 한다. 인생은 고뇌와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다. 그 길목에 서서 바른길로 안내해주시던 어머니가 이 순간에는 더없이 그립다. 어머니가 늘 하신 말씀처럼 지친 마음에 활력을 주는 마중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마중물을 나의 아이들과 이웃에게도 고스란히 나누어 주고 싶다.

하루해가 산마루로 스러지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시골길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바람의 부드러운 결이 옷깃을 쓸고 간다. 우물 옆의 돌담 벽이 정겹다. 진보랏빛 천일홍의 무리가 잔잔한 정취를 만든다. 나무 뒤로 넘어가던 저녁 햇살이 물결 따라 유등처럼 천천히 떠돈다. 어둑한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깊은 그림자를 새긴다. 달빛이 차곡차곡 쌓여 하얗게 내린 풍경은 편안한 숨을 고른다.

오늘 밤에는 남편과 마을에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예전에 어머니가 나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도란도란 사는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걷고 싶다. 아이들도 어느새 훌쩍 커서 집을 떠나 멀리서 제 삶을 열심히 잘 살아낸다. 북적거리던 집에는 순식간에 남편과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퇴근해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린다. 부엌에서는 두부 숭숭 썰어 넣은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온 집안에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코를 벌름거리며 들어오는 남편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마중물처럼 대문 앞에 나와 남편을 기다려본다. 집 앞에 이어진 에움길에는 어느새 가로등 불빛이 새하얗게 내린다. 하늘 끝자락에서 실눈 뜬 손톱 달의 볼우물이 곱다. 감나무 우듬지가 불빛 받아 청안하다. 굽은 길섶에서 자동차의 전조등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가스 불에 찌개를 다시 올려야겠다.



정병휘 기자 news@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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