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수필 부문 당선자인 이현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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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휘 기자] 죽순과 가죽

한창 발전하는 남쪽지방 소도시에서 간판재료를 판매하셨던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아 가게를 알차게 일구셨다. 하지만 지리산 자락의 산골 출신인 당신은 항상 산을 그리워하시다가 지천명이 되시던 해에 야트막한 산을 하나 마련하셨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그 산등성이에는 향기로운 복숭아밭이 있었고, 산 아래에는 청량한 대숲을 두른 아담한 시골집과 풍성한 텃밭이 딸려있었다. 가게와 산을 오가시느라 아버지는 정신없이 바쁘셨지만, 그 시절 당신의 얼굴에 피던 웃음은 햇살처럼 밝았다.

자식들이 모두 슬하를 떠난 뒤, 아예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부모님은 산에서 나오는 먹거리를 거두는 낙으로 여생을 보내셨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는 선홍색 배롱나무 꽃이 고운 산마루에 누우셨고, 홀로 되신 아버지는 산에서 위안을 얻으셨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깔끔하신 당신은 진종일 텃밭과 산을 오르내리면서 잠시도 손을 쉬지 않으신다. 맑은 날은 밖에서 뭔가를 거두시고, 궂은 날은 집 안에서 사부작사부작 갈무리를 하신다. 인근 도시에 사는 막내 동생이 매일 시골집에 들러 아버지의 조석을 살피고 일손을 거들어드린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막내는 엄마를 닮아 자태가 곱고 아버지를 닮아 손끝이 맵다.

아버지의 먹거리들은 어느 것 하나도 살뜰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죽순과 가죽이 으뜸이다. 시골집 대숲에서는 죽순이 참 많이도 난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의 뜻은 봄날 대밭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촉촉하게 봄비가 내린 뒷날이면 밤사이에 자란 죽순의 크기에 입이 딱 벌어진다. 죽순은 땅에서 나오면서부터 떫은맛이 퍼지기 시작하므로 가능하면 빨리 손질을 해야 한다. 딱딱한 겉껍질을 벗겨내고 밑 둥과 위쪽의 뾰족한 부분을 조금 잘라낸 다음 2등분한다. 소금과 마른 고추를 넣은 쌀뜨물에 죽순을 푹 삶고, 찬 물에 24시간 담가두어 아린 맛을 우려낸다. 매끄럽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 어린 죽순의 윗부분은 세로로 썰고 밑 부분은 가로로 썬다. 진공 포장한 죽순은 냉장고에서 한 달 정도 보관이 가능하고 더 오래두고 먹을 것은 냉동실에 넣어두면 1년 내내 다양한 죽순요리를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참죽나무의 어린 순인 가죽은 충청북도 이남의 얕은 산지나 척박한 땅에서 잘 자란다. 시골집 뒷마당에는 참죽나무가 절로 나고 절로 자란다. 가죽의 맛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다. 4월이 제철인 가죽의 줄기는 어세보이지만 막상 손으로 당겨보면 탄력이 있으면서도 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25cm 내외의 가죽 순을 가지런히 정리하신다. 어린 아이 손가락 굵기의 가장 튼실한 것은 장아찌로 담그고, 중간 크기는 무침을 하고, 제일 여린 것은 부침개 감이다. 찹쌀 풀, 멸치 액젓, 매실액 등을 넣은 고추장에 박아 둔 가죽 장아찌를 나는 냉장고 깊이 모셔두고 삼겹살을 먹을 때나 입맛이 없을 때에 아껴가면서 먹는다. 된장과 고추장을 넣어 무친 가죽 나물과 고추장으로 간을 한 밀가루 반죽에 연한 잎을 넣어서 부쳐낸 가죽 부침개도 봄날의 별미이다.

가죽 장아찌와 나물과 부침개가 소박한 맛이라면 가죽 자반은 화려하고 섬세하고 오묘한 맛이다. 만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그 맛은 그 과정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소금물에 가죽을 살짝 데친 후 채반에 놓고 물기를 말린다. 찹쌀로 묽은 풀을 쑤어 가죽에 바르고 햇볕에 충분히 말린다. 포슬포슬 마르면 고추장이 들어간 붉은 풀을 쑤어 고르게 덧바른 후 다시 햇볕에 말린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가죽 자반을 그냥 먹어도 맛있고 완전히 마른 자반을 굽거나 튀기거나 쪄서 먹어도 맛이 기가 막힌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죽순과 가죽은 생일날이나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그 소중한 먹거리들을 나누어 먹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 먹기는 더욱 아까워서 특별히 마음이 가는 지인들에게만 아주 조금씩 나누어준다.

아버지의 나이, 팔순을 넘기셨다. 하지만 당신의 총명함과 강건함은 아직도 감탄스럽다. 산에서 태어나 산을 그리워하다 지금 산에 살고 계신 것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하신다.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아들을 출가 시킨 후에 나도 시골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막내 동생의 타박을 들어가며 내가 어설픈 손길로 죽순과 가죽을 다듬을 때, 햇살 좋은 툇마루에 앉아계신 아버지가 아직도 건강한 웃음을 웃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정병휘 기자 news@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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