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동화 부문 당선자인 박진미씨.
'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동화 부문 당선자인 박진미씨.

[정병휘 기자] 접이식 의자

“헉, 헉!”

백 번도 넘게 다닌 오르막길이지만 정진이는 여전히 힘이 듭니다. 신발 바닥에 닿는 시멘트 길이 오늘따라 더 까칠하게 느껴집니다.

“뚱땡이 녀석! 내가 왜 거지야?”

정진이는 혼잣말을 하다말고 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다음 말을 하려니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습니다.

‘엄마도 없는 녀석이 까불고 있어.’

혁수의 말이 계속 정진이의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정진이는 지난가을 교통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계신 언덕빼기 집으로 왔습니다. 아빠는 먼 곳으로 일하러 가고 할머니랑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정진이는 ‘거지’라고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이라는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혁수가 3학년 중 제일 덩치가 크다는 것도 잊은 채 덤벼들고 말았습니다.

오르막 중간쯤 재활용 분리수거함을 지날 때였습니다. 바닥에 놓인 물건 두 개가 정진이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 아빠랑 낚시 갔을 때 앉았던 의자다.”

정진이는 접이식 의자를 한손에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쾅.

정진이가 녹슨 대문을 걷어찼습니다. 빼꼼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 마당 가장자리에 의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정진이는 마루에다 가방을 던지고 벌러덩 누웠습니다.

“정진이 왔냐?”

할머니 목소리에 정진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손에 검은 봉지가 들려있습니다.

“뭐예요?”

정진이가 검은 봉지를 뚫어지게 보았습니다.

“떡이야. 아랫집에 갔다가 얻어 왔지. 먹어 봐.”

할머니는 봉지 안의 떡을 꺼내 정진이 앞으로 내미셨습니다.

“안 먹어요! 우리가 거지예요? 만날 얻어오고.”

정진이의 목소리가 까슬까슬 했습니다. 할머니는 슬그머니 떡을 내려놓으시고 마루 끝에 앉으셨습니다.

“정진아,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할머니 눈에 걱정이 가득 찼습니다. 정진이는 혁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살다보면 얻어먹을 때도 있고 내가 줄 때도 있고 그렇지.”

정진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였습니다.

할머니는 정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셨습니다. 그래도 정진이의 우울한 기분은 풀리지 않습니다.

“정진아, 너 엄마 보고 싶지 않니? 내일 할미랑 엄마 보러 갈래?”

정진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정진이는 할머니 손을 잡고 집 뒤로 이어진 등산로를 올랐습니다. 이 길을 오르다 보면 통천사라는 작은 절이 나옵니다. 그곳에 엄마가 있습니다.

엄마가 있는 봉안당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습니다. 할머니가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께 인사부터 드리자고 하셨지만, 정진이는 봉안당 쪽으로 곧장 뛰어갔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얼굴로 사진 속에만 있습니다. 정진이가 와도 손을 잡아 줄 수도 안아 줄 수도 없습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정진이는 속으로 엄마를 수도 없이 불렀습니다.

정진이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절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정진아, 이리로 와 보렴.”

기다리고 계신 듯 큰스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정진이는 신발을 질질 끌며 큰스님 방문 앞으로 갔습니다.

“들어와.”

정진이가 퉁퉁 부은 얼굴로 큰스님 앞에 앉았습니다. 큰스님이 두툼한 보퉁이를 내놓으셨습니다.

정진이는 보퉁이 속을 슬쩍 들여다보았습니다. 옷입니다. 한눈에 봐도 새 옷은 아닙니다.

“싫어요.”

정진이는 큰스님을 똑바로 보지 않고 딴청을 부렸습니다.

“헌 옷이라 싫은 게냐?”

“아니에요. 그냥, 그냥 만날 얻기만 하고 자존심이 상해요.”

정진이는 어릴 적부터 사촌 형이 입던 옷이나 신발을 자주 물려받았습니다. 그때는 괜찮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존심이라, 그럼 너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되지 않느냐?”

큰스님의 말씀에 정진이가 고개를 바짝 들었습니다.

“제가 베풀 게 어딨어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라도 되면 모를까.”

“정진아, 돈 십 원 들이지 않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게 여러 가지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말도 안 돼요. 그런 게 어딨어요?”

정진이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니, 이 녀석아 들어보기나 해. 나처럼 이렇게 얼굴에 웃음을 띠고 부드 러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도 베푸는 것이야.”

“치, 그게 뭐 베푸는 거예요?”

정진이가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원 녀석도, 넌 누구랑 만날 때 웃었으면 좋겠냐? 찡그리고 성냈으면 좋겠 냐?”

“그야 웃으면 좋지요.”

정진이가 쭈뼛쭈뼛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너 참 잘한다, 예쁘다 이런 말들도 다 베푸는 게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옳거니 바로 그것이다. 이제 보니 우리 정진이가 보통이 아니구나.”

큰스님의 칭찬에 정진이의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정진이 너 혹시 다른 사람이 무거운 걸 들고 갈 때 도와준 적 있니? 아 니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본 적이나? 그것도 다 베푸는 것이란 다.”

정진이는 여전히 부루퉁했습니다. 그것이 진짜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널 위해 가져온 사람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가져가야지. 입고 안 입고는 네 마음이야.”

큰스님이 보퉁이를 다시 정진이 앞으로 미셨습니다. 정진이는 쭈뼛쭈뼛 보퉁이를 가슴에 안았습니다. 큰스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였습니다.

“큰스님 안녕하세요?”

어떤 아줌마가 문밖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혼자 오셨어요? 혁수는요?”

큰스님의 말에 정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오려고 하지 않아요.”

“그 녀석도 참, 아빠가 보고 싶을 텐데. 참, 이거 받으세요.”

큰스님은 정진이에게 준 것과 똑같은 보퉁이를 아줌마에게도 주었습니다. 정진이는 집으로 오는 내내 아줌마와 혁수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렸습니다.

정진이는 보퉁이를 마루에다 내려놓고 마당을 어슬렁거렸습니다.

“어, 저거.”

어제 주어온 접이식 의자입니다. 정진이는 얼른 걸레를 가져다 의자를 닦았습니다.

“좋은데, 아직 쓸 만해.”

정진이는 의자를 접어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대문 앞 평평한 곳에의자 두 개를 펼쳤습니다.

동네가 한눈에 다 들어옵니다. 여기저기 솟은 높은 건물은 마치 거인이 블록 놀이를 해 놓은 것 같습니다.

초여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었습니다. 정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우산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온 정진이는 의자에 앉지 않고 주춤거렸습니다. 의자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정진이는 말없이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라, 네 의자구나. 물어보지도 않고 앉았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진이는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이 오르막을 오를 때마다 여기쯤에서 쉬었다 가고 싶었는데 딱히 앉을 때가 있어야 말이지. 오늘은 네 덕분에 잘 쉬었다 간다. 고맙다.”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시며 정진이의 어깨를 도닥이셨습니다. 정진이는 선생님께 칭찬받았을 때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떠나시자 정진이도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금세 다시 나온 정진이 손에 큼지막한 글자가 쓰인 종이가 들려있었습니다. 정진이는 종이를 의자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쉬어 가세요^^

종이에 삐뚤빼뚤 쓰인 글자들이 싱긋 웃고 있었습니다.

정진이는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의자를 내놓았습니다.

“엄마, 여기 잠깐만 앉았다가요.”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정진이는 대문 밖을 살짝 내다보았습니다.

“아빠가 이 꽃을 좋아할까요?”

혁수가 하얀 국화꽃을 가슴에 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꽃보다 우리 혁수가 와서 아빠가 참 좋아하시겠다.”

전에 보았던 아줌마도 옆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엄마, 정진이가 아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속상했어요. 그래서 엄마 없는 녀석이라고 그랬어요.”

정진이 마음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혁수에게 아빠가 사준 게임기를 자랑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혁수의 볼을 타고 땀이 흘렀습니다. 정진이는 시원한 물을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혁수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정진이를 보았습니다.

“고, 고마워.”

혁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아빠 잘 만나고 와.”

정진이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두 친구의 얼굴에 햇빛이 환하게 비쳤습니다.



정병휘 기자 news@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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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박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