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휘 기자]
'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인 김미정씨.
'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인 김미정씨.

사블레


204호는 항상 잠들어있었다. 깨어 있는 시간은 하루 중 식사를 할 때와 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리고 간식으로 사블레를 먹을 때뿐이었다. 가끔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도 꿈결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매번 식사시간이 되면 204호를 깨워 밥을 먹였고 약을 챙겨 주었다. 이틀에 한 번은 샤워를 시켜주고, 체조 시간이면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거닐었다. 그리고 가끔은 함께 정원에서 볕을 쬐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시설 안에 있는 예배당에 갔다. 204호의 핏기 없는 얇은 입술에 발그레한 립글로스를 발라주고 단정한 외출복을 입혀 예배당 안으로 휠체어를 들여 주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들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204호의 잠은 치매 때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치매가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204호의 치매는 내게 휴식 같은 시간을 안겨 주었다.

요양원은 도심을 벗어난 실버 단지 안에 있었다. 3개 동의 낮은 주거 아파트와 함께 지어진 요양 병동은 시설도 좋지만 서비스가 더 좋다는 소문으로 대기자가 많았다. 들리는 말로는 요양원 입원이 단지 내 아파트 입주자 우선이기에 덩달아 아파트 매매 값도 오른다고 했다. 겉보기에 요양 병동은 다른 아파트와 다르지 않은 건물이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주위의 넓은 지상이 녹지로 되어있고 차는 지하주차장에만 주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의 정원은 잘 다듬어진 공원처럼 가꿔졌고 실버 단지 주민만 이용할 수 있도록 외부인은 통제되었다.

어쨌든 정원의 연못에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쳤고 곳곳에 있는 벤치는 언제나 앉아 쉴 수 있도록 깔끔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꽃들은 쉴 새 없이 피었고 가지 많은 정원수는 그늘을 주고 바람을 탔다.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드는 모습은 숲에서처럼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아늑한 그곳의 풍경은 이상하게도 쓸쓸하고 우울했다. 거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고요한 정원에는 무기력한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아파트 안에서도 그 고요는 마찬가지였다. 몇 번의 산책 시간, 204호가 탄 휠체어를 밀며 아파트 동과 연결된 통로를 지나 아파트의 복도를 오간 적이 있었다. 굳게 닫힌 회색 현관문이 나란한 복도는 상류층에서 인기가 있는 아파트라고 하기는 썰렁하고 스산했다. 나는 휠체어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만 크게 울리던 복도를 지나며 철문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들이 있을까 궁금해지고는 했었다.

그와 다르게 요양 병동은 활기가 있었다. 헬스장과 수영장, 편의점, 예배당, 미용실, 병원, 약국, 재활치료실이 함께 있는 건물에서는 간호사와 간병인들 그리고 몇몇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요양인들은 매일 시간에 맞추어 함께 식사하고, 체조하고, 레크리에이션을 했다. 산책 시간에는 복도로 나와 거닐었고, 곁을 지키는 요양사들은 동네 이웃을 만나 이야기하듯 소곤댔다. 모든 병실의 문은 열려있었고 갖가지 증세의 환자들은 방을 지나치는 간호사와 요양사의 관심을 받으려고 투정의 소리와 몸짓을 했다. 그러기에 요양원에서는 일상들의 소란과 고요들이 주거 아파트나 공원과는 다르게 모두 공유하게 되었다. 204호는 2층에 있는 다른 16개 병실의 중앙이라고 해야 할 곳에 있었다. 병실 앞 로비에는 간호사실과 안내 데스크가 있는 탓에 종종 수선스러웠지만, 환자의 상태를 알리고 급한 상황이 있을 때를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병실은 시설 좋은 원룸텔 같았다. 몸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설계된 방은 물론이고 욕실의 좌변기와 샤워 시설도 세심했다. 싱크대에는 인덕션, 전자레인지, 그릇 건조기가 설치됐고 살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간단한 조리기구들도 수납되어 있었다. 세탁기, 냉장고, 3인용 소파와 탁자 그리고 독일제 자동침대와 더불어 간병인의 잠자리로 꽤 괜찮은 보조 침대가 있었다. 내게는 만족한 근무조건이었지만 그렇게 좋은 시설이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환자 대부분은 몸을 가눌 수 없었고 의식도 온전하지 못했기에 환자보다는 간병인을 위한 배려 같았다. 그런 고급 시설과 차별화된 일대일 케어는 그곳의 특별한 서비스였다. 드물게 한 방에 두 명의 환자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방이 비워지기까지 대기 상태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든지 내가 이곳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게 된 것은 행운 같았고 자부심도 들었다. 그러기에 하루의 시작이 고되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두더지 소굴 같은 지하 방의 우리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도 출근 시간에 맞추어 전철을 탔다. 송정역까지는 거의 1시간을 가야 했다. 새벽 5시가 넘은 시간이라서 아직 전철 안은 붐비지 않았다. 멀찍이 한 남자가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정차하는 역을 확인하고 있었다. 곧 내려야 할 역이 다가선 듯 보였다. 나는 재빨리 그 앞으로 가서 섰다. 전철을 타고 빈자리에 앉게 되는 날이면 왠지 그날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내게 딱히 기쁘거나 행복하다고 할 만큼 좋은 일은 없지만 그래도 별다른 사건과 사고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과 함께 가끔은 막연한 설렘 같은 것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내게 어제와 다른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같은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스마트폰에 시선을 두었다. 내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조만간 자리를 비울 것이란 기대를 해 보기로 했다.

남자의 옆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여학생의 몸이 남자에게 점점 기대어갔다. 고개는 갸우뚱 숙어졌고 긴 머리카락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출렁였다. 책가방인 듯한 백팩을 짧은 치마 위에 얹고 두 팔은 풀어져 잠이 들어있었다. 가방 위에 뒤집혀 있는 스마트폰의 이어폰이 학생의 귀에 꽂혀 있었다. 마치 배터리 충전선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지난밤 소진되었을 여학생의 체력이 고속 충전되는 것이라면 좋겠다고.

남자가 종로3가역에서 내렸다. 나는 그 빈자리에 앉았다. 여학생은 잠시 몸을 곧추세우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전철 안은 점점 비좁아지고 있었다. 앉아 있는 내 무릎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다리와 부딪칠 것처럼 가까워졌다. 탁한 공기 때문인지 피로감이 왔다. 오늘 하루 치러내야 하는 일과들을 생각하니 긴 하품이 났다. 아직도 사십 여분을 더 가야 하는데 옆자리의 학생은 점점 더 내 어깨를 짓누르며 기대왔다. 어깨를 움칠대어 자세를 고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도 곤히 잠든 학생을 깨우는 것도 미안스러웠다. 사실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게 깨우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피곤을 더는 휴식이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학생의 가방 위에 놓인 스마트폰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듯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떨어지면 주워주면 되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전철을 타고 등하교했다. 개봉역에서 학교가 있는 종로5가역까지는 전철로 40분 정도의 거리였다. 매일 전철역을 오가며 걷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는 항상 잠이 들었었다. 앉아 있을 때는 고개를 젓고, 서서도 잠이 들어 다리를 휘청거렸다. 그렇게 졸거나 잠이 들어 종점인 인천까지 가서 되돌아오기가 여러 번이었다.

그런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가 작고 동그란 노란 열매를 주었다. 살구 같기도 하고 귤 같기도 한 것이 향기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달콤했다. 친구는 자기 집 마당에 있는 탱자나무의 열매라고 했다. 나는 손으로 감싸다가 내 손에 밴 향을 맡아보고, 다시 얼굴에 비비며 주위를 맴도는 향기를 확인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도 향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열매를 꾹 짜며 담아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탱자를 터뜨려 보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향을 풍길 수 있는지 껍질을 까고 안을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속이 터진 탱자는 향기를 잃고 버려질 것 같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또다시 지루한 전철을 탔다. 그날은 바로 빈자리가 생겨서 앉게 되었다. 나는 탱자가 잘 있는지 궁금했다. 무릎 위에 놓인 가방 속으로 손을 넣고 탱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가방에서 탱자를 꺼내면 모두가 나의 탱자를 바라보거나, 향기로운 향이 나는 곳이 어디일까 궁금해 할 것이라고. 그래서 은근히 기대되는 마음으로 책가방에서 탱자를 꺼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나의 책가방에서 나온 작은 탱자는 관심도 없었고 탱자의 향기는 그들의 코에 닿지도 않는 듯했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탱자의 향기는 나에게만 머물고 취하게 할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탱자의 향이 날아가지 않고 오래오래 내게 머물도록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이 들어 있는 사이에 차는 종착역인 인천까지 가고 말았다. 안내 방송에 깨어보니 내 손안에 있던 탱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데굴데굴 굴러 어디로 굴러갔을지 모를 탱자를 텅 빈 전철 안에서 찾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아직도 그때의 울적함과 섭섭함이 가끔 내 삶 속에서 되살아나곤 했다.

여학생의 스마트폰이 기울어진 가방의 끝까지 밀려나 있었다. 아무도 학생의 스마트폰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살짝 들어 학생의 배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며 스마트폰에 켜져 있는 동영상을 흘낏 보았다. 아마도 동영상 강의인 듯했다. 나는 여학생이 잠든 상태에서 듣는 강의라도 머릿속에 남겨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지 수면 중 뇌에 주는 자극도 무의식적으로 저장된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204호는 침상에 있지 않으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방안의 티브이는 항상 켜져 있었고 휠체어는 티브이 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204호가 티브이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모컨은 나의 손에 있었고 채널을 돌려도 204호는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볼륨을 키워도, 줄여도 잠잠했다. 어떨 때는 204호가 티브이의 번쩍이는 광선을 즐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인가, 창으로 어스름하게 해가 지며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던 날. 나는 인기가 있는 가요프로를 보느라 어둑한 병실의 불을 켜지도 않고 티브이에 빠져 있었다. 옛 가수들의 잔잔한 노래가 끝나고 요란한 광선을 번쩍번쩍하며 젊은 가수가 나왔을 때였다. 204호가 ‘으음’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204호의 반응이 반가웠지만 그런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그저 언제나처럼, 사블레 드릴까요? 하는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물음에 답이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블레를 조각내어 204호 입에 대주었다. 204호는 입을 다물고 뭔가를 확인하듯이 두리번거렸었다. 무엇을 확인하려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빛은 그녀의 꿈과 현실을 오간 것이 분명했다.

전철이 심한 곡선 길을 달리다 양평역에 섰다. 여학생은 내게 기대었던 고개를 반대로 흔들다가 깨어났다. 그러고는 급히 가방과 스마트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무작정 출구를 향했다. 너무 곤히 자던 것이 창피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내려야 할 역이 지났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여학생은 전철 문이 닫히기 바로 전 발 빠르게 전철을 내려섰다. 나는 여학생이 어떤 기운이나 느낌으로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전철의 창문 밖으로 두리번거리며 역을 확인하는 여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요양원에 도착하여 김 요양사와 교대를 했다. 그녀는 탈의하는 동안 밤사이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을 풀어냈다.

“203호는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고 해. 이제 방이 비면 201호에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방으로 가겠지”

이곳의 죽음은 무뎌진 칼로 삶을 모질게 끊어 내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의 지루한 고통은 슬픔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러기에 오히려 죽음은 위협적이거나 두렵지 않았고 은혜 받은 사건처럼 축복받을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이번 달 들어 첫 번째라는 둥, 벌써 세 번째라는 둥 입방아에 오르다 기억에서 사라는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203호는 음식을 거부했었다. 코에 연결된 호수로 영양액을 주입하며 버틴 날들이 몇 개월째였다. 그런데 그것마저 싫다며 한두 달 전부터 수시로 코의 호수를 빼냈다. 간호사와 요양사가 주의했지만,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라 결국은 손발을 묶어 놓았었다. 손과 발이 묶인 203호는 한동안 ‘엄마, 엄마.’ 하며 소리쳐 부르다 요즘은 지쳤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김 요양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치며 엄마를 부르던 할머니가 이젠 정말 엄마를 만나러 가려나 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휠체어에 앉은 204호를 바라보았다. 백발의 커트 머리는 오늘도 단정했고 소라 색 카디건 위의 푸른 숄은 휠체어를 가릴 만큼 컸다. 무릎에는 모란인지 장미인지 분명치 않은 꽃 그림의 가벼운 담요가 덮였고, 두 손은 모아 감싸 쥐었는데 가녀린 손가락이 작고 고았다. 간호사의 말로는 평생을 바느질과 뜨개질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고 했다. 두 자식 중 한 명은 대학교수라고 했고 또 한쪽은 기업가라고 했다. 그들은 가끔 204호를 방문하여 먹다 지칠 만큼의 사블레와 한 뭉텅이의 요구르트를 냉장고에 채우고 잘 부탁한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 갔다. 204호는 자신의 자식들이 왔는지도 갔는지도 모르고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고, 가족들은 204호와 같이 있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옷을 다 갈아입은 김 요양사가 퇴근할 생각을 않고 자리에 앉았다.

“216호 알지?”

“응. 병원 원장이었다던 할아버지?”

“아이고, 그래도 남자라고. 내가 어제 오후 그 방 언니가 일이 있다고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잠깐 시간을 내어 할아버지 샤워를 시켜줬잖아. 글쎄 사타구니를 씻기는데 그게 서더라니까. 죽지 못해 산다고 그렇게 입만 열면 말하던 양반이…….”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다스러운 것도 그랬지만 무심코 내던지는 말들은 나의 신경에 거슬렸다. 어느 날인가도 퇴근을 하려다 204호의 기저귀를 한 번 더 갈아주려 할 때였다. 그녀는 나에게 무척이나 선심을 쓰듯 말했었다. ‘그냥 놔둬. 한 번 더 싸면 내가 갈아 줄게. 그냥 퇴근해.’ 나는 그녀가 나를 무척이나 배려하는 듯이 말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어 그냥 퇴근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혹시나 204호가 듣고 있지는 않았는지, 기저귀를 밤새 갈지 않은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 뒤로 그녀와의 이야기는 즐겁지 않았다. 이번에도 불편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204호의 휠체어를 밀며 산책하러 나가야겠다고 했다. 김 요양사는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오가는 것은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쏘아붙이듯이 하고 나갔다. 나는 또 개운하지 않은 마음이 들어 오늘은 꼭 아파트 정원이라도 산책 삼아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블레와 음료수를 챙기고 휠체어에 앉은 204호의 어깨에 푸른 숄을 흘러내리지 않게 다시 둘러주었다. 그리고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휠체어를 세우고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데스크의 간호사가 우리를 보며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바람을 쐬겠다는 말에 간호사는 빙긋이 미소를 보였지만 왠지 못마땅하다는 표정 같아 보였다.

정원은 5월의 봄을 보였다. 조금 전 출근하며 왜 보지 못했던가 싶게 나무의 잎들은 짙어져 있었고 하늘은 푸르렀다. 아직 진득한 열기가 없는 따사한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잘 가꾸어진 잔디에 휠체어가 바퀴 자국을 남길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휠체어를 밀고 햇볕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204호가 고개를 들었다. 흔들어 깨울 때만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식사하고,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던 204호였는데. 나는 휠체어 앞으로 가서 204호를 마주 보았다. 곱게 빗겨진 흰 머리카락이 이마에 흘러내려 바람 따라 들썩거렸다. 모아 쥐고 있던 손가락은 펴져 무릎 담요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늘게 벌어져 있는 눈꺼풀 사이로 갈색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했다.

“사블레 드릴까요?”

204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휠체어를 연못가의 벤치까지 밀고 가서 고정했다. 그리고 그녀를 부추기고 일으켜 굴곡진 등받이의 벤치에 앉혔다. 과자를 조각내어 204호의 입에 대었고 204호는 새 둥지의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입을 오물거리는 204호의 모습은 ‘지나온 시절 어느 순간의 행복이 이랬어.’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204호 곁에 앉았다. 사블레를 입에 넣었다. 씹지 않아도 녹아나는 과자는 달콤했다. 어릴 적 이 과자를 조금씩 나눠가며 먹던 때가 기억났다.

과자가 귀하던 시절 집에 찾아온 손님이 사블레를 선물로 사 온 적이 있었다. 과자는 설탕의 단맛과 다르게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바삭하게 부서지며 입안에 들어와서는 스르르 녹아 넘어가던 기억. 나는 그때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생들과 나눠 가진 사블레 몇 개를 종이에 싸서 다락에 숨겨 놓았었다. 다락 안의 과자를 한 조각 입에 넣고 나와서 오물거릴 때면 동생들이 무얼 먹고 있냐고 물었었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벌리면 달콤한 향이 퍼져 동생들에게 숨겨 놓은 사블레를 빼앗길 것 같았다. 기억해 보면 과자 한 조각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엄마의 병원비와 동생들의 학비는 숨길 것이 없는 빈 통장을 갖게 했었다. 결혼 후에도 생활이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벌이 남편은 자신의 건강에만 관심을 쏟고 다 큰아이들은 부모의 관심을 귀찮아했다. 모두 입안에서 까끌까끌 거리는 모래알 같았다.

“맛. 나. 다.”

나는 204호가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처음이었다. ‘맛나다’란 말을 정확히 들었으면서도 다시 확인하려고 204호에 물었다.

“네?”

“좋아.”

정말 204호가 말을 한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던 터라 신기하기만 하여 204호를 향해 또다시 물었다.

“여기 좋죠?”

나의 물음에 204호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던졌다.

“꿈.”

무슨 꿈이라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204호의 대답이었다.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소리라고는 신음 같은 ‘음음’ 소리만 내던 204호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오랜만이었다.

“무슨 꿈이요? 지금요? 꿈이 아니에요. 깨어계시니 참 좋네요. 전 항상 할머니가 주무시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거든요.”

그러나 고요했다. 나의 소리는 허공에서 떠돌다 흩어져버린 것만 같았다. 연못의 작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기둥 끝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토닥토닥 물 위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었다.

나는 다시 과자를 204호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음료수 빨대를 입에 대어 주었다. 투명한 빨대로 노란 음료가 힘겹게 딸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빨대 안의 음료가 멈칫하고 도로 쭉 내려갔다. 204호의 졸음이 또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204호의 입에서 빨대를 슬그머니 빼고 음료수 컵을 벤치에 올려놓았다.

그때 어디선가 탱자 향이 풍기는 것 같았다. 나는 향을 찾아 일어섰다. 204호는 무릎 덮개를 손가락으로 몇 번을 쓸다가 언제나처럼 다시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가끔 자동차 소음이 들리다가는 사라졌지만 그건 오히려 우리가 세상 밖의 세상에 있다는 착각을 하게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그 일상 속에 묻혀있던 사소한 소리와 움직임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탱자 열매를 잃어버려 슬퍼하고, 몇 개의 사블레를 다락에 숨겨 놓고 뿌듯해하던 어린 시절 어느 날에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릿해지고 공간의 경계가 없어진 듯했다. 204호의 고개가 끄떡했다. 그러고는 또 잠이 오는지 끄떡이던 고개가 조금 더 수그러졌다. 어쩌면 달콤한 사블레를 입안에서 오물거리다 세상 밖의 세상으로 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던 어느 날, 바느질하며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의 어느 날로.

나비가 날아왔다. 처음에는 주스의 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비는 204호의 무릎 덮개 위에서 날개를 팔랑이며 빙빙 돌았다. 어쩌면 무릎 덮개에 그려진 빨갛고 노란 꽃의 색으로 꿀이 있는 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개미가 모여들었다. 제법 통통한 두세 마리의 개미가 과자 부스러기를 들고 어딘가로 나르고 있었다. 길을 헤매지 않고 익숙하고 빠르게 기어가고 있는 개미들. 나는 개미들을 보며 저 조그마한 과자 부스러기를 얼마 동안 먹게 될까 궁금해졌다.

개미보다 큰 나는 개미보다 더 큰 걸음으로 잔디 위를 걸었다. 잔디는 폭신했고 촉촉하기까지 했다. 바람결에 슬쩍슬쩍 탱자의 달콤한 향이 스치듯 지났다. 연못 주위를 걸었다. 벌써 하루살이들이 수선화와 튤립꽃 위에서 개구리알 덩이처럼 뭉쳐 날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204호, 그리고 나비, 개미, 하루살이, 나무와 꽃과 바람, 연못의 물소리와 햇살. 모두 잠이 든 듯 고요해 보였지만 이런 고요가 무언의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음악 같기도 하고 사랑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마음이 설레었다. 마치 탱자를 조물조물하며 행복해했던 그 날처럼 잃어버렸던 탱자를 다시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기쁨인지 반가움인지 행복인지 모를 것들이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사실 어른이 되어 탱자를 사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향이 전과 다르게 억지스럽게 짙었고 부드럽지 않으며 독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 어린 날의 그 탱자 향이 어디서인가 불어왔다. 나만이 알 수 있는 그 날의 향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204호를 바라보았다.

204호가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미소를 지으며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미간에 힘을 주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죠?”

“꿈이야.”

꿈이라고? 나는 또다시 뜬금없는 말을 하는 204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무엇이 꿈인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204호는 자신의 말도, 나의 말도 듣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곧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묻고 싶었던 말은 하지도 못한 채 점심 벨 소리에 204호를 깨우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에요. 들어가야죠.”

나는 204호를 부추기고 일으켜 휠체어에 앉혔다. 이상하게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204호였다. 휠체어의 발받침에 발을 올려놓으니 발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워 204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가늘게 새어 나오는 훈훈한 바람을 확인하고 휠체어를 밀었다. 무엇이 꿈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시 잠이 든 204호에 섭섭했다.

노인이 되면 어린아이가 된다던 말은 식사할 때의 모습을 보고하는 말 같았다. 모두가 턱받이를 하고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유아원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요양사들은 어린아이를 다루듯 노인을 어르고 타이르며 식사를 도와야 했다. 몇몇은 손이 불편하여 음식을 입에 넣어주어야 했고, 스스로 밥을 먹는 사람들도 음식을 떨어드리고 입에서 흘렸다. 205호는 오늘도 식판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음식을 탐했다. ‘나는. 나는.’하고 소리치다 팔을 뻗어 204호의 그릇에 담긴 밥을 한 수저 떴다. 205호의 담당 요양보호사인 정 요양사가 나에게 미안하다며 한숨을 푹 쉬고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나는’이라는 말밖에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삐쭉대며 내게 말했다.

“205호 말이야. 아들이 검사라지? 그러면 뭐 해 곁에 사람만 있으면 큰소리로 ‘나는. 나는’하고 외치기만 하는데. 누가 함께 있고 싶겠어. 너무 시끄러워.”

나는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205호는 정 요양사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쳤다. 나는 혹시나 205호가 우리의 말을 다 알아듣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아마도 그 불안함은 며칠 전 205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모두가 낮잠 시간을 맞춘 것처럼 잠이 들어 조용한 오후였다. 204호의 휠체어를 밀며 병실의 복도를 지나다가 문이 열린 205호의 방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가지런히 개고 있던 205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뭔가 들키고 말았다는 머쓱함 같기도 하고, 말을 나누지 않았어도 나를 잘 알고 있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던 순간 정 요양사가 호들갑을 떨며 나타났었다. 나는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 정 요양사의 ‘언제 깨어나셨대요, 티브이라도 틀어 드려요?’ 하는 말과 205호의 ‘나는. 나는’ 하는 외침이 들려왔었다. 오늘도 205호는 ‘나는’을 외치느라 식사시간이 길어질 것이었다.

식사시간이 길기는 204호도 마찬가지였다. 매끼 식사가 죽에 가까운 연한 밥으로 일반인이라면 한두 번 씹고 넘길 양이었지만 작은 스푼의 밥을 입안에 오래 담고 삼키는 탓에 식사시간이 지루하게 길었다. 평소에는 204호가 음식을 씹고 있는 것인지 오물거리다 삼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에 밥을 넣어주느라 오래 걸렸는데 오늘은 식사시간이 짧게 끝났다. 이상하게도 한두 수저를 받아 오물거리다 삼키고는 입을 다물었다. 수저를 입에 대면 가늘게 벌어지던 입술이 꿈쩍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정원에서부터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밥까지 밀어내다니 정말 이상했다.

“왜 그러세요. 오늘은 밥맛이 없으세요?”

204호는 정원에서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도 식사 생각이 없어졌다. 보통은 노인들이 식사를 마치면 요양보호사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는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204호를 데리고 소란스러운 식당을 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이르게 204호의 몸을 씻기고 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도 하지 않은 204호의 몸이 오늘따라 무직하게 느껴져 샤워 의자에 옮겨 앉히는 것이 힘들었다. 204호는 간간이 ‘음, 음.’ 하는 소리를 내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204호의 주름지고 딱딱해진 피부의 곳곳을 비누 거품으로 문지르고 샤워기 물로 쓸어내었다. 뽀득뽀득한 수선으로 물기를 거둬주고 백발의 머릿결도 곱게 빗어 넘겨주었다. 새로 꺼내 놓았던 내의를 입히고 목욕탕에서 나오니 거실 창으로 여름 햇볕 같은 따스한 빛이 방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나는 왠지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204호와 함께 정원으로 나가서 다시 벤치에 앉아 있고 싶어졌다. 그래서 204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에요.”

204호는 무릎에 놓인 손의 집게손가락을 움칠거렸다.

“기저귀를 차야 할까요?”

무심코 나온 말이 머쓱해서 다시 말했다.

“조금 전의 소라색 카디건을 입는 게 좋겠어요. 저는 그 카디건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좋거든요. 할머니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숄과 무릎 담요도 필요할 거예요. 사블레와 음료도 필요하겠죠.”

우리는 요양 병동을 나와서 정원에 들어섰다. 몇 시간 만에 나뭇가지의 잎들이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촉촉하던 잔디도 풋풋하게 느껴졌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벤치로 향했다. 그러고는 어제도 그제도 이곳에서 볕을 쬐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204호를 벤치에 앉히고 나도 곁에 앉았다. 사블레를 조금 떼어 204호의 입에 대었고 204호는 입에 넣어 준 과자를 오물거렸다. 나도 과자를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탱자 이야기와 사블레 이야기를 204호와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204호의 사블레 이야기와 꿈에 대해 듣고 싶어졌다.

졸음이 왔다. 고개가 끄떡했다.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던 짧은 순간 동안 수분이 지나간 듯이 시간이 잘렸다가 이어진 것 같았다. 옆에 눈을 감고 있는 204호를 보며 나에게 졸음이 전염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초여름 바람을 들이켰다. 그리고 무릎에 놓인 과자를 만지작거리다 조금 떼어먹은 뒤 또다시 눈을 감았다. 입안에 사블레의 귀퉁이가 부서지며 솜사탕이 꺼지는 것처럼 녹아들어 갔다. 버터의 고소한 향과 함께 여운만 남고 사라져가는 사블레.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내 입술에 사블레를 대어 주었고 나는 자연스레 받아먹었다. 행복했다. 그냥 행복했다. 아주 귀한 것을 먹고 있다거나 또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를 먹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무도 알 수 없고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지금 웃음 나게 좋았다.

“꿈이라고 말했던 것을 알 것 같아요.”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개미가 발목에 기어올라 간지럽게 했다. 바람은 적당히 불며 탱자 향기를 내게 보내왔다. 작은 분수의 물방울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아름다웠고 머리 위에선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가지를 출렁였는지 잎들이 사르락 소리를 내었다. 햇볕은 나뭇잎들 사이를 들락이며 얼굴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분명 예전 언제인가 내게 이런 날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탱자와 사블레의 추억은 내 얼굴에 어른거리는 햇볕 조각 중 하나일 뿐일 것이야.

나는 204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할머니도 이런 날이 있었을 거예요.”

나는 눈을 떴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하늘은 짙은 잿빛을 띠기 시작했고 멀리 하늘은 붉은 기운을 넘기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204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들어있었다.

“이제 들어가야겠어요.”

204호는 고요했다. 항상 그래 왔는데 오늘따라 조금 다르게 보였다. 입가에 미소가 있고 두 팔은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한 손에는 사블레 조각까지 잡혀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204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훈훈한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놀랍거나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호들갑스럽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보다 204호의 잠은 어떤 것일까 했다. 그리고 조금 전 내 입에 넣어진 사블레가 204호의 손에 쥐어진 사블레의 반쪽이었을까를 생각했다.

해가 기울고 정원 등이 노랗게 빛을 내었다. 나는 204호의 곁에 앉아 정원 등에 모여드는 나방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서 여러 사람이 몰려나오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한미순 님. 어디 계세요. 294호 할머니! 서은숙 요양사님!”

204호 할머니 이름이 ‘한미순’일까? 그동안 병실 문 앞에 붙어 있는 방의 번호만 흘낏 보아왔었다. 왜 지금껏 문 옆에 있던 이름 석 자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일까. 한미순 할머니를 찾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모여든 사람 중 한 사람이 잠이 들어있는 할머니의 어깨를 흔들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한미순 할머니가 옆으로 기우뚱하다 쓰러졌다. 무릎 위에 있던 과자 봉지에서 사블레가 흩어져 떨어졌다. 정원의 노란 등에 나방들의 날개 부딪는 소리와 사람들의 흥분된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타닥타닥’ “언제부터였어요?” ‘타닥타닥’ “일단 요양사님은 204호실을 정리하세요.” ‘타닥타닥’ “아! 그리고 운명하신 시간이 어떻게…….” ‘타닥타닥’

잔디 위에 떨어진 사블레가 사람들의 서성대는 발걸음에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한미순 씨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알 수 없어요. 언제부터였는지.”



정병휘 기자 news@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