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휘 기자]
'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인 김완수씨.
'제1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인 김완수씨.

증거


그가 오늘 죽었다. 그의 부음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통쾌감보다 허무감을 느꼈다. 그가 막상 죽으니 뒤끝이 영 개운치 않았다. 철구는 카페에서 그의 죽음을 내게 전하며 이제 그만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는 철구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구가 전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엔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다. 내가 철구에게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했을 때, 철구는 오히려 혀를 끌끌거리며 나를 타박했다. 망자의 죽음을 산 사람의 잣대로 저울질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철구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아 언짢았다.

“그놈이 죽었다고 우리 기억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는 거여? 우리는 죽지 못해 포도시 살 아왔는디.”

내 목소리가 컸는지 철구가 놀란 눈으로 카페 안을 휘둘러봤다.

“내 말을 그렇게 곡해하면 어떡하나? 내 말은 그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고, 사연이란 게 있을 테니 이쯤 해서 용서하자는 거지. 그게 인간의 도리고.”

나는 성자처럼 말하는 철구가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용서라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온당가? 가해자는 반성허지도 않었는디.”

철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나이라고. 세상이 바뀌었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흑 백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겠어?”

철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지만, 나는 그의 죽음으로 과거를 청산하자는 말 같아 철구가 변절자로 느껴졌다. 철구는 내 과거 청산의 생각과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배신감은 더 컸다. 그가 최소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신이 했던 말로 인해 또 다시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사과라도 했더라면 나는 철구 생각에 깨끗이 수긍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말없는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한 셈 아닌가. 내가 갈증을 느껴 커피를 들이켜는데, 철구의 휴대 전화에서 벨 소리가 났다. 철구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통화를 끝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게에 거래처 사람이 온다고 해서 얼른 가 봐야겠어. 못다 한 얘기는 다음에 하세.”

나는 철구가 자기 할 말만 하고 휭 나간 것이 서운했다. 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부당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철구 말대로 오늘만은 죽은 자에 대해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어머니는 안방에서 돋보기안경을 쓴 채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삼십 년 넘게 계속된 것이어서 나는 어머니가 집에서 성경책을 펼치지 않는 날이 더 이상했다. 어머니는 어느덧 여든의 나이를 훌쩍 넘겼지만, 총기를 잃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엄숙한 의식을 보는 순간 차마 그의 죽음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안방에 들어온지도 모르고 소리 내 성경 구절을 읽었다. 망설였다. 하지만 오늘을 넘기면 그의 죽음조차 객관성을 잃고 왜곡돼 전달될 것 같았다. 어차피 그의 죽음을 전하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일이었다.

“어머니, 그 사람이 죽었다네요.”

내가 애써 덤덤하게 말하자 어머니가 돋보기안경을 벗고는 고개 들어 나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녀석, 평소에 주어 없이 말혀서 핀잔을 좀 줬더니 이젠 에둘러 말혀서 에미를 시험에 들

게 허는 거냐?”

나는 어머니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표정만 지었다.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그를 이미 용서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그놈이요. 정양호.”

‘정양호’란 이름 석 자를 듣는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태연한 척했지만, 성경책을 붙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임무를 다 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어머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낚아챘다.

“천벌을 받은 거제. 어떻게 죽었다냐?”

“자살이라네요.”

어머니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쥐꼬리만 한 양심은 있었나 보구먼. 내가 죽기 전에 만나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었 는디.”

어머니는 그와 만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어머니는 기독교에 귀의한 뒤 그를 용서했음에도 그는 어머니의 삶에서 남편의 살인자란 딱지를 뗄 수 없었다. 그는 직접적인 학살자도 발포 명령 책임자도 아니었지만, 엄연히 학살을 모사하고 지휘한 사람이었다. 문득 그가 죽기 전에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가졌던 일이 떠올랐다. 이것은 지금도 어머니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또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는 삼십 구 년 전의 학살이 있은 뒤로도 반성의 기미 없이 뻔뻔스러운 행보를 계속 보였다. 내가 그를 만난 날에도 그는 군의 원로라는 이름으로 보수 단체들이 주관한 집회에 초대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나는 철구와 함께 집회 참가자들 틈에 섞여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광장은 이미 수많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점령하고 있었다. 우리 손에도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다행히 참가자들은 우리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매주 주말에 열리는 태극기 집회에 그가 연사로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단죄할 수 있는 호기였기 때문이다. 철구에게 그 소식과 내 계획을 알렸을 때, 철구는 호랑이 굴에 가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라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철구를 설득했고, 철구는 고민 끝에 나를 따랐다. 철구는 내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삼십 구 년 전에 일어난 비극의 방관자였던 데 대해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철구 본인이 스스로 진 빚이 아니라 아내로 인해 떠안은 빚에 가까웠다. 철구는 시간의 부채 의식과 아내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늘 갈등했다. 그래서인지 철구는 내 앞에서 내 아버지 얘기는 물론이고 자신의 장인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누구의 아버지가 됐든 연관된 얘기가 나올 것 같으면 말을 아끼고, 내 의견에 귀 기울였다. 그것은 철구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군인의 딸이었던 철구 아내 역시 우리 가족 앞에서는 늘 죄인처럼 작아졌다. 나는 철구 부부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짠했다. 그래서 나는 철구에게 어떤 동참도 강요하거나 사정할 수 없었다. 식자재 납품 일로 바쁜 철구가 내 길을 함께 나서 줄 때는 든든했지만, 자신의 아내에게 남자들이 흔히 하는 거짓말로 상경하는 이유를 둘러댈 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가 무대 연단에 서자 우리는 대형 스크린을 쳐다보며 그의 연설에 귀 기울였다. 그는 예상했던 대로 종북 좌파들이 국민을 선동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촛불 집회는 빨갱이들의 발악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태극기를 쥔 내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연설이 절정에 달할 땐 태극기를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철규가 옆구리를 꾹 찔러 눈치를 주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태극기를 함께 흔들었다. 그의 연설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가 내게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켰다.

“폭도들은 말합니다. 1980년의 광주사태도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그런데 그 현장 한가운 데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폭도들의 거짓말을 잘 압니다. 광주사태는 북한 빨갱이들과 남한 빨갱이들이 손잡고 남한의 민주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던 국가 전복

음모 사건입니다. 폭도들은 그것도 민주주의 역사라고 하는데, 개가 웃을 일이지요. 여러 분, 그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내버려 둬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고령임에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손 팻말을 쳐들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열띠게 호응했다. 참가자들의 입에서 저주에 가까운 극언이 쏟아지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듣던 대로 거의 노년층이었다. 그런데 결연해 보이는 표정과는 다르게 얼굴엔 하나같이 생기가 없었다. 표정과 행동이 따로 놀 때는 우스꽝스러운 망석중들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픽 나왔다. 집회가 절정에 이르자 참가자들 입에서 점점 험한 말들이 나왔다. 내가 광장으로 가면서 철구에게 집회 참가자들이 불순한 배후 세력에 의해 동원되는 것 같다고 귀띔했을 때, 철구는 삼십 구 년 전 그때에 군사 정부의 명령으로 시민들을 학살한 군인들 처지와 별반 다를 거 있겠느냐고 대꾸했다. 나는 회유와 명령의 차이일 뿐이지 철구의 비유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연설이 끝나 가자 우리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갔다. 다행히 무대 앞에 이르렀을 때, 그가 무대에서 막 내려와 뒤편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재빨리 그를 뒤따랐다. 그에게 접근하기까지 간혹 우리를 힐끗 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제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그게 태극기의 힘이자 최면이라 생각했다.

그는 대기실에서 곧 밖으로 모습을 보였다. 그에게선 손에 들었던 태극기도 몸에 걸쳐 맸던 어깨띠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행사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과 잠깐 얘기를 나누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 역시 여든의 나이를 훌쩍 넘겨 자글자글한 얼굴인데도 자세는 꼿꼿했다. 문득 살인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굽실거렸을 군인들과 그 부역자들의 폭압에 쓰러졌을 사람들이 함께 떠올라 서글펐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는 미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걸었다. 그런데 광장을 벗어날 때쯤 그가 수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희뜩거렸다. 나는 조바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다. 그는 전철역 쪽으로 가고 있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엔 차라리 광장이 전철 안보다 나을 성싶었다. 철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광장을 벗어나기 전에 그를 따라잡으려 했다. 그는 위기를 느끼고 종종걸음을 쳤지만, 노인의 거동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는 곧 체포하듯 그의 양옆에 나란히 섰다. 그에게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기력도 용기도 없어 보였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떨치기 위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주위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구가 예상치 못한 말을 해 나는 깜짝 놀랐다.

“사령관님,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사령관님의 신변 보호를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철구 목소리는 비밀 요원처럼 제법 굵직했다. 원래 뚱한 철구가 어떻게 그런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가 우리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늘 이렇게 불안하게 사십니까?”

철구가 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한 일이 있잖소. 적이 많은데, 편안할 리 있나.”

그에게서 다소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럼 지금 그때 일을 후회하시는 겁니까?”

내가 사투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끼어들었다. 나는 그에게서 반성한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후회는 무슨. 그땐 내 역할이 시대적 소명이었고,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누군가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는걸. 언젠간 재평가받을 날이 오겠지.”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양심을 기대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리고 그가 역겨웠다. 나는 외투 안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철구가 그의 눈을 피해 내게 다급하게 손사래를 쳐 보였다.

“그나저나 늙은이를 언제까지 찬 데 세워 두고 취조하듯 물을 거요?”

그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저희가 따뜻한 찻집에라도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셔서 담소를 더 나누면 좋겠습니다만.”

철구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늙은이와 할 얘기가 뭐 있다고. 내 과거 일이라면 하도 얘기를 해서 이제 신물이 나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저희가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요새 사회가 어수선해서요.”

내가 기회를 벼르던 끝에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제의도 단번에 뿌리쳤다.

“허허, 내가 죄인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서 자네들 도움을 바라겠나. 나를 도울 여력이 있 으면 저기 노인네들이나 지켜 주시오. 불쌍한 사람들이니까.”

그가 턱짓으로 아직도 한창 시위 중인 사람들을 가리켰다. 나는 다시 철구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석양빛을 받은 철구가 양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를 처단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훗날을 위해 결국 그를 놓아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철구가 내 팔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달려가 뒤통수라도 후려갈겼을지 모른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시위대의 소리가 오늘내일하는 것처럼 등 뒤에서 쇠잔하게 들려왔다.

나는 돌아와서도 그를 고이 보내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철구와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철구가 무심하게 잠에 곯아떨어져서이기도 했지만, 그를 대하던 철구 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사실 철구는 삼십 구 년 전의 시간에 구속될 일도 빚을 질 일도 없었다. 철구는 자신의 아내처럼 외지인이었다. 어쩌면 철구는 보지 않아도 되고, 당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피해자였는지 모른다. 철구 부부는 불운하게 그 시간 즈음에 현장에 둥지를 튼 철새나 다름없었다. 철구는 나와 어깨동갑으로 나보다 한 살 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군대를 다녀왔다고 했다. 철구는 제대해 군수 회사에 취직했는데,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인지 나이보다 성숙해 보였다. 그래서 서로 말을 트고 지내면서도 나는 철구가 형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철구 아내는 비극이 있기 일 년 전 가족과 함께 광주의 부대에 사단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왔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 사단에 군수품을 납품하며 종종 광주를 오가던 철구는 부대 내에서 아내를 만나 교제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철구가 예비 장인의 눈에 든 건 아니었으나 성실하고 듬직한 철구의 사람됨에 예비 장인은 결국 교제를 허락했다고 한다. 철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광주에 눌러살았는데, 말로는 철구가 광주로 발령받은 것이라 했지만, 예비 장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비극이 있은 뒤 결혼해 신혼집을 따로 얻었어도 그때까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가살이를 한 셈이었다.

내가 철구를 알게 된 건 철구가 자신의 아내를 만난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나는 비극이 있기 석 달 전에 철구를 부대 근처의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부대찌개를 잘하는 집이었다. 그때 철구는 부대 영관급 장교들과 어울려 회식하고 있었고, 나는 군에서 막 제대한 고등학교 친구 종수와 식사하고 있었다. 내가 종수와 식당에 들어서기 전부터 방에 자리한 철구 일행은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귀에 거슬리는 음담패설들이 새어 나오자 홀에 있던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나는 종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때만 해도 아직 군인 정신이 몸에 밴 종수가 철구 일행에게 예의 바르게 주의를 주고 싶었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곧 커지고 말았다. 종수가 철구 일행이 있는 방으로 가 따지자 술 취한 장교들 몇 명이 종수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그때 계급이 부대 밖에서도 비상식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뒤늦게 종수를 말렸지만, 종수는 장교들에게 당당히 목소리를 냈고, 장교들은 곧 종수에게 린치를 가했다. 식당은 난장판이 됐으며 순간 벌어진 일에 나도 철구도 끼어들 새 없었다. 경찰서에까지 가 곤욕을 치렀지만, 다행히 철구의 중재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엔 문제의 장교들이 어차피 부대 내부에서 자체 징계를 받는 데다가 종수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런데 정작 곤혹스러운 건 철구였다. 일이 알려지면 철구는 자칫 예비 장인으로부터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철구는 다급했는지 종수에게 거액의 치료비 부담을 제시했고, 종수는 그 선에서 합의했다. 우리는 나중에 철구가 마련한 술자리에 함께했는데, 마침 연배도 비슷해 서로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에게 비극이 일어났다. 그런데 철구 부부는 그 비극을 겪고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철새인 줄 알았던 철구 부부는 어느새 텃새가 돼 이곳에 적응해 있었다. 다른 계절에서 날아온 철구 부부는 누구보다 이곳의 계절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은명이는 여태 소식이 없제?”

내 방에 와 그의 죽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따라 들어와 동생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의 검버섯 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동생은 내게 서울 가겠다는 문자 메시지 한 통만 달랑 보낸 채 집을 나간 뒤 보름이 넘도록 아무 연락 없었다. 나는 간간이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확인한 사실이라곤 동생이 살아 있다는 것뿐이었다. 동생 친구는 동생을 전철 안에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잘 지내는 것 같으니 걱정 마세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어머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려? 누가 우리 은명이를 봤다던?”

어머니가 내 옆에 바싹 다가붙어 앉았다. 어머니는 요즘 들어 가끔씩 심장이 안 좋다며 우황청심환을 찾았다. 나는 어머니의 건강을 생각해 성의껏 둘러대기로 했다.

“서울 친구 집에서 지내며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모양이에요.”

“서울은 인심이 고약허다는디, 참 고마운 친구가 다 있구먼.”

어머니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입에서 뭔가 더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외면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돌파구를 찾았다. 그것은 죽은 그의 얘기였다. 그것은 나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의 얘기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 차라리 동생 얘기를 하는 것보다 나았다.

“사실은 저 정양호를 만난 적 있어요.”

순간 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그려, 그놈헌테서 사과는 받었니?”

얘기를 공연히 꺼낸 것 같았다.

“아, 네, 자기 딴으로는 죄책감이 있었나 봐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어머니의 눈을 볼 수 없었다. 뜸을 들이다가 본 어머니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인간, 지옥으로 갔을 거다. 모질어서 목숨도 스스로 끊었겄제. 다른 말은 없었고?”

어머니는 내게서 기어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자기가 헌 일을 잘 알고 있더라고요. 자기가 미움 받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염병, 죽을 때 돼서 철들면 뭐 하누? 그것도 마지못혀서.”

내가 웃음으로 동의하자 어머니는 더 이상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은명이도 이제 나이 사십이 넘었으니 제 앞가림은 허고 살 거예요. 또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나는 구부정한 어깨로 돌아서 가는 어머니에게 장담할 수 없는 말을 해 찜찜했다.

그의 목소리와 부음이 아직 생생할 때, 동생 소식이 들렸다. 아침 일찍 소식을 전한 곳은 서울 노원경찰서였다. 경찰서라는 말에 나는 가슴이 괜히 두근거렸다. 내가 동생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하자 어머니는 읽던 성경책에서 손을 뗐다. 어머니는 내내 말이 없다가 내가 외출할 채비를 하자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으려 했다. 나는 굳이 함께 가겠다는 어머니를 간신히 만류할 수 있었다. 주말이라 상경하는 길이 꽉 막힐 것이라 할 때서야 어머니는 결국 포기했다. 나는 혼자 상경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동생의 지난한 시절을 돌이켰다. 동생은 1980년의 아픔을 겪고서 또 한 번 고통스러운 성장통을 겪었다. 나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동생은 곱게 자라 주지 않았다. 동생은 흉악한 소문이 채 가라앉지 않은 시기에 취학했다. 그런데 동생이 변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쯤이었다. 갑자기 말수가 줄더니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하루가 멀다고 친구들과 싸웠다. 급기야 고등학교 때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집을 나갔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 들어오는 일을 반복했다. 건달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말이 동네 사람들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동생은 마음잡지 못했다. 그럴수록 집과 학교에 정착하지 못한 채 철새처럼 자신의 계절을 찾아 떠돌았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동생이 비뚤어지고 일탈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생은 상처 받은 땅에서도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 동생을 변함없이 품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떡볶이 장사를 하며 한동안 가장 노릇을 했던 어머니는 동생에게서 돈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손에 돈을 쥐여 주기 일쑤였고, 동생이 습관처럼 어머니의 지갑에 손을 대 새벽같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도 애써 모른 척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못마땅했지만, 나 역시 동생에 대한 과보호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뒤늦게 군대를 다녀와 공무원이 된 나는 곧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어머니를 모시며 한때나마 안정적인 삶을 누렸다. 그런데 동생이 사고를 칠 때마다 뒷수습하느라 도무지 직장 일과 남편 역할에 충실할 수 없었다. 동생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는 대신 그때그때 물고기를 쥐여 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근무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동생을 찾아 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이 있으면 나는 뿌리치지 못해 동생의 행방을 찾아다녀야 했다. 내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을 땐 간혹 철구가 대신 동생을 찾아 나서 주기도 했다. 동생은 군대를 다녀온 뒤 한동안 집에 붙어 있는 듯했지만, 현재의 계절에 적응하지 못해 겉도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혐오하며 지금껏 독신으로 지내 온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 듯 아팠다.

동생은 수갑을 찬 채 초췌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갑 찬 손은 수건에 가려져 있었지만, 속박당한 동생을 본 순간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행색이 남루한 동생을 못 알아볼 뻔했다. 동생을 계속 보고 있자 눈물이 핑 돌았다. 동생은 나를 보고도 넋 나간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보름 사이에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내가 동생에게 그간의 사정을 물으려는데, 동생을 취조하던 담당 형사가 내 신분을 확인하며 방해했다.

“최은명 씨 형님 되십니까?”

각진 얼굴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형사가 묻자 나도 모르게 위축됐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화상으로 동생이 경찰서에 온 연유를 대충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게 거짓말 같아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형사가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목격자 진술과 시시 티브이 분석을 토대로 짜여진 것이라며 보름 동안의 동생 행적을 브리핑하듯 설명했다. 동생은 서울의 찜질방을 떠돌며 나처럼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 가서 김서방 찾기라고 그를 찾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 동생은 우연히 찜질방의 텔레비전에서 방송에 출연한 그를 보고 방송사에 연락을 취해 그의 연락처와 집 주소를 알아내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방송사가 패널의 신상 정보를 아무에게나 알려 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동생은 방송사 근처를 배회하며 그를 기다리는 일을 반복하다가 우연히 또 방송에서 정보의 단서를 얻었다고 했다. 그는 야권 내 한 유력 정치인과의 친분을 떠벌리듯 말했는데, 함께 자주 가는 식당을 실명으로 밝히고 만 것이었다. 당장 식당을 찾아간 동생은 유력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행세하며 식당을 대신 예약하러 왔다는 구실로 그의 연락처와 집 주소를 용케 알아냈다고 했다. 하지만 전화를 안 받아 동생은 그의 집을 찾아갔고, 가족으로부터 그가 마침 산행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추적해 산으로 간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제 동생이 그럴 리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다니요. 제 동생은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 허는 사람입니다.”

나는 동생을 대신해 항변했지만, 형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형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앞에 흑백 사진 한 장을 들이밀었다.

“그게 선생님 말처럼 간단하지 않아요. 그 정양호 씨가 사망하던 시간에 동생 분이 산책 로를 서성거리는 모습이 시시 티브이에 포착됐습니다. 그런데 동생 분이 통 입을 열어야 말이죠.”

형사 말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사진을 들여다봤다. 형사가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진엔 동생이 있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동생이 시시 티브이를 쳐다보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형사에게 무릎을 꿇고 선처를 바랄까 생각했다. 하지만 우선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형사님, 우리 은명이가 거기 있었다고 혀서 범인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사는 내 희망을 냉담하게 차 버렸다. “정양호 씨의 사망 추정 시간이 새벽 네 시경입니다. 그 시간에 동생 분 혼자 산책로에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요?”

“허지만 제 동생이 그놈, 아니 그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동생 분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무혐의로 밝혀질 때까지 유치장에 구금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형사는 완강했다. 문득 군법무관들과도 친분이 있는 철구가 생각났다. 철구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했지만, 더 이상은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제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조사해 주십시오.”

나는 결국 머리를 조아리며 형사에게 사정했다. 그런데 형사가 눈을 깜짝이더니 내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제가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알아보니 가족 분들이 오일팔 희생자 유가족이 시더라고요? 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형사 말은 겁박에 가까웠다. 나는 힘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리고 문제의 해답을 동생에게서 찾고 싶어 동생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동생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데도 남의 일인 양 무관심한 동생이 야속했다.

“자백을 하면 정상참작이 돼 감형될 수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동생 분을 잘 설득 해 주십시오. 저도 어린 동생이 있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워 드리는 말씀입니다.”

벌렁거리는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담당 형사가 나를 회유하려 했다. 내가 동생을 바라봤지만, 동생은 끝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이 그를 죽였다는 물증이 없었다. 차라리 그의 자살이란 사인이 더 신빙성 있었다. 나는 잠깐이나마 동생이 범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동생을 살인자로 단정한 형사에게 화가 났다. 동생이 침묵으로 일관한 것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도 나처럼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형사도 지쳐 갈 때쯤 젊은 형사가 문서 한 장을 들고 와 담당 형사에게 건넸다. 형사는 문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나와 동생을 번갈아 봤다. 형사의 표정은 심각했다. 형사가 동료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곧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동생의 수갑을 풀었다. 형사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시시 티브이만 믿고 실수했습니다. 과학수사연구원 감식 결과 정양호 씨의 사망 이 자살로 판명됐다고 합니다. 동생 분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형사는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입에 발린 말로 넘어가려 했다. 나는 경찰서 에 있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내가 녹초가 돼 있었다. 마음에 없었지만, 나는 형사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들도 버리기로 했다.

단락 바뀜

동생을 데리고 집에 오자 어머니는 나보다 동생을 반겼다. 아니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동생은 어머니에게 여전히 철부지 자식이었다. 그런데 동생 얼굴을 어루만지던 어머니가 내 앞에서 동생을 나무랐다.

“니 형을 생각혀서라도 이제 말썽 그만 피워야 헌다. 알었제?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 안 듣게 허려고 니 형이 아버지처럼 니를 키웠는디, 속만 썩여서야 되겄냐? 니 형수만 생 각허면 내 속에서 천불이 난다.”

어머니가 한동안 안 하던 처 얘기를 꺼내자 내가 오히려 울화통이 터졌다.

“어머니는 왜 또 새삼스럽게 그런 얘기를 허신다요!”

“니 처야말로 몹쓸 사람이어서 그라제. 우리 가정사를 뻔히 알면서 남편이 어린 동생을 돌보는 꼴도 못 보고 집을 나가야?”

“아따, 어머니는 그놈도 용서허셨다면서 어째 그 사람은 용서 못 허신다요? 마음에 남은 응어리가 있거들랑 이제 그만 다 씻으세요.”

나는 더 있다간 어머니에게 큰소리를 낼 것 같아 냉큼 안방을 빠져나왔다. 내 처지를 누구 탓으로도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날의 기억에서 떳떳하고 싶었다. 내 방에 와 장롱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외투 안주머니 속에 든 칼을 꺼내 서랍 깊숙이 감췄다. 나는 이제 그날의 폭력이 아닌, 그날을 왜곡하는 현실과 싸우고 싶었다.

잔뜩 흐려 있는 날 철구 부부가 예고도 없이 집에 들렀다. 겉으로는 어머니 얼굴을 보고 싶어 온 것이라 했지만, 우리 가족에게 뭔가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미리 연락이 닿았는지 곧 종수도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모습을 보였다. 종수는 타지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 했다. 어머니는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손님들을 반기고는 과일을 내오러 부엌에 갔다. 나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가 흐뭇했다. 은명이가 친구들에게 수줍게 인사했다. 은명이는 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에 몰라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과를 깎아 접시에 내오자 철구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철구 아내가 먼저 말문을 뗐다.

“민주가 자꾸 미국으로 오라고 해서 이참에 이이도 사업을 정리하고 함께 건너가려고요.”

민주는 철구 부부의 미국에 있는 외동딸이었다. 어릴 때의 민주 얼굴을 종종 봐 민주는 내게 딸이나 다름없었다. 민주는 유학 중에 만난 남자와 결혼해 미국에 거주해 왔는데, 틈날 때마다 철구 부부의 미국행을 권유한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뜻밖의 일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종수도 놀란 듯 눈을 끔뻑거렸다. 어머니는 엷은 웃음만 머금었다.

“그라믄 아예 미국에서 사는 거여? 이제 우리가 미국에나 가야 만날 수 있겄네?”

종수가 묻자 철구 부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딸내미가 하도 졸라서 버틸 수가 있어야지. 손자도 보고 싶고. 그래도 짬짬이 한국에 오 게 될 거야.”

철구가 우리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나는 가족 같은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한편으론 철구 부부의 마음이 이해돼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철구 부부는 사십 년 가까이 이곳에서 정을 붙이고 산 만큼 타성이란 것을 알 법도 했다. 그리고 그동안 치유와 희망이 아득해 보이던 현실에 지쳐 있었을 것이다. 철구 부부가 인사하고 일어서는데, 어머니가 손에 쥐고 있던 사진 한 장을 철구에게 건넸다. 사진은 지난날에 우리 가족이 철구와 함께 행방불명된 내 아버지를 찾아 온 시내를 헤맬 때, 한 시민이 찍어 건네준 것이었다. 우리는 철구 부부의 도움으로 죽은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은 흑백이었지만, 확증처럼 선명했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철구 부부가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울컥한 듯 얼굴이 벌게졌다.

“아따, 다시는 못 올 사람처럼 왜 그런당가?”

종수가 은명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철구 부부와 종수가 떠날 때, 제비가 마당을 낮게 날다가 하늘을 가로질러 떠났다. 비가 내리고 나면 세상이 한결 청명해질 것 같았다.



정병휘 기자 news@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