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유난히 큰 코를 빗대어 작명된 동물 코끼리는 여타의 동물에 비해 지능이 높고 온순하다. 인간과 쉽게 동화된다. 가장 큰 특징인 코는 윗입술과 붙어 있다. 코를 치료하고 연구하는 의사 입장에서 코끼리 코에 약 15만 개 이상의 근육이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코의 근육들은 인간의 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콧소리를 통해 위험을 알리거나 초저주파를 발생해서 무리와 소통하는 것도 모두 코의 역할이다. 그래서인지 코는 코끼리의 전부이자 상징이다.

인지언어학자인 미국의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최근 다시 꺼내 들었다. 제목에서 눈치들 채셨겠지만 계몽주의적 신념이 현실에서 왜 통하지 않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해답을 던져주는 인문학의 필독서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일탈적 나태함을 동경해간다. 그도 그럴 것이 복잡하고 지난한 사회생활에서 때론 깊은 사유는 단순함보다 스스로를 더 힘들게 할 것이라는 학습된 경험치가 작동한 탓이다. 관계 속에서 늘 상대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요점만 얘기하라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일면 이해가 되는 현상이다. 어쩌랴, 공동체에 대한 고민보다 개인에 대한 이해가 득세하는 애절한 시대적 흐름인 것을.

레이코프는‘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강조하면 결국 코끼리 밖에 생각이 안 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인지 언어를 통해 의도된 프레임의 민낯을 지적한다. 코 박사인 내게 있어 코끼리 코의 다양한 기능을 익히 알고 있기에 레이코프의 책 작명은 그다지 적절치는 못한 것 같다. 인간의 손처럼 쓰이며 입처럼 기능하는 코끼리 코가 인지언어학의 객관적 비유로 쓰이기엔 적절치 않다는 의미이다.

주장은 있으나 설득은 취약한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나의 기호에 부합하는 이들에 대한 인간의 호감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호감을 가지는 이들에 대해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늘 옳고 그름에 대한 사리판단이 흐려진다. 이럴 때 인식의 오류는 당연히 수반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그렇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은 시민들의 더욱 게으른 사고를 위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자주 활용해왔다. 오죽하면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을 관리하는 정부에게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는 이들보다 진영논리로 생각하는 획일적 분할에 익숙한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국토에 오천만의 인구가 무한 경쟁 속에 살아가며 다양한 인간의 사고가 수용되는 것을 사회적 혼란으로 혼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논쟁거리가 간단명료하길 바란다는 자체가 전체주의적이다. 매번 늘 언제나‘복잡한’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그 사회 공동체에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령은 본디 시끄러운 것이기에. ‘코끼리뿐만 아니라 뭐든 생각해’가 되어야 한다.

대화 속에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다면, 그가 가진 사고방식에서 가장 손쉽게 판단할 단어에 대한 동의 혹은 거부를 활용한다. 그리고 협조를 이끌어낸다. 전형적 프로파간다의 전략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이 강요된 명령으로 코끼리만은 생각하게 할 불온한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그 의도는 일방적 지지를 획득할 악의적일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

자주적인 인간이라면 코끼리든 뭐든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 속에서 상호 존중의 협조가 수반되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히틀러의 의도대로 사고하는 자체를 귀찮아하는 이들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뿐이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다.

좌우로 편향된 정치인들이 만들어 내는 가공의 프레임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은 시민이 깨어있는 시민이 될 것은 분명하다.

안태환 프레쉬이비인후과의원 강남본원 대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