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언제부턴가 TV 채널에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차고 넘실거린다. 음식은 화면을 통해 현대인의 미학이 되고 식욕을 대신해주는‘먹방’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기존의 쿠킹쇼와 맛집 탐험을 훌쩍 넘어서 예능까지 그 영역을 넓혀 음식 방송은 TV를 점령했다. 바야흐로 음식 전성시대이다.

음식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요소로서 생을 이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섭취해야 되는 생명줄이다. 문학이 이성의 정수리에 위치한 본능의 고백이라면 음식은 인간 오체의 생존에 대한 직접적 욕망이다. ‘문학을 홀린 음식들’의 작가 카라 니콜레티는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여성 푸주한이다. 전직 요리사인 그녀는 "부엌에 있으면 좋은 책이 주는 것과 같은 평화를 얻는다. 양질의 훌륭한 식사만큼 매혹적인 것이 없으며, 좋은 책을 읽는 것만큼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공감이 간다. 그렇게 음식과 문학은 인간의 욕구를 적절히 버무려 농익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생각해보라. 우연히 들린 식당 음식이 어머니의 집 밥과 너무 나도 흡사한 맛을 낼 때, 그 말 못 할 회환과 감동의 경험들은 누구나가 갖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의무적인 한 끼의 식사가 주는 우연치 않은 감동은 우리의 고단한 삶을 풍성하게, 기운 내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음식이 가진 힘이다.

인간의 언어가 저마다의 어감과 의미로 형상화되어 말과 글로 발원될 때 음식의 식재료도 그러하다. 서로 다른 의미와 예우를 받는다. 어떤 재료는 세계 공통의 음식 문화를 만들어내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그 어떤 재료는 해당 민족의 자부심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 어떤 식재료는 그 모양만으로 효능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때 치매를 예방한다고 알려진 견과류, 그중 호두는 인간의 뇌와 형상이 비슷하다. 인간의 심장 구조와 비슷한 토마토는 심장에 좋고 폐와 비슷한 형상을 지닌 포도는 혈압을 조절하는데 효능이 입증되었으니 참으로 오묘하다.

요리사의 손에서 완성된 한 그릇의 음식에는 재료에 대한 선택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음식을 먹는 이들의 삶의 배경까지 부단한 인생이 녹아있다. 그 안에는 역사와 함께 피어난 음악, 영화, 그림, 소설 등으로 어우러진 삶의 기쁨과 슬픔, 위로와 희망이 가득 담겨 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음식은 인간의 희로애락이다.

최근 읽었던 다이나 프라이드의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은’내게 음식의 미학에 대해 탐닉하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의 식사, ‘에덴의 동쪽’속 야외 식사, ‘율리시스’속 양 콩팥구이 등은 활자로 전해오는 미감이 더없이 고혹적이어서 지극히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내심 책 속의 음식들을 직접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쉽기도 했다. 문학 속 음식들을 눈으로 보듯이 행복하게 그려보는 독서의 시간은 형상화하지 못할 미각이었다.

흔히 춘원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한국 농촌계몽소설의 쌍벽을 이루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속의 음식도 그러했다. 소설 속에 등장한 음식들을 살펴보니 생뚱맞게도 ‘오믈렛’같은 서양 음식도 등장하지만 일제 강점기, 농촌에서 즐겨 먹던 전통음식들이 그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일제 치하의 식생활은 민족의 수난만큼 가난한 밥상이다. 그러나 자연친화적이면서도 건강한 음식들이다. 돌나물김치와 짠지가 그러했다. 화려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아니지만 생태적 재료의 토속적 맛의 깊이는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할 음식이 분명하다.

건강한 내 몸을 위한 결기 하나, 상록수 속 농촌 밥상도 좋고 호기 있는 서양식 오믈렛도 좋다. 세상의 모든 음식을 사랑한다면 파스칼 키냐르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아침은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아침밥은 챙겨 드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