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보았을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토대를 이뤄낸 선지자이다. 알려진 명성만큼 생전에 아무런 저서를 남기지 않아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글들을 통해 그를 유추할 수 있디.

그러나 영혼에 대한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실천적 철학자였음은 분명하다. 역사적 문헌에 일관되게 기록된 그의 생애가 그러했고 죽음도 그러했다. 후세에 그를 높게 평가하는 주된 이유는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다 갔기 때문이다.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의 일상 속에서 내재된 언어와 행동으로 구현되기란 쉽지 않다. 무릇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이성의 실행은 영원한 인간의 과제이자 한계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귀납법에서 찾았다. 사람들 간의 대화를 통한 문답법에서 잘못된 지식을 비판하면서 일반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싯적, 철학이라는 난해한 학문을 싫든 좋든 접해본 이들이라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갖는 철학사에서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장롱 속 관념철학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제자 플라톤이 기술한‘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 알려진 그의 재판 과정은 인간 소크라테스를 보다 깊게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철학은 어렵다는 편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책을 접한다면 의외의 재미를 느낄 수 있고 깨달음은 덤이다.

뜬금없이 ‘웬 소크라테스냐’고 묻는다면 그의 문답법이 의사와 환자 간에 이뤄지는 대화를 너무도 빼닮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의사도 그러하다. 환자의 시시콜콜한 신상에 대해 관심어린 질문만으로도 대화의 분위기는 서로 간의 경계심이 무너지며 평온해진다.

올바른 정의, 진중함과 무모함의 차이, 인간의 사랑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어쩌면 오늘날 환자의 구두 문진표일 수도 있다.

질환의 히스토리를 찾아 가는 치료의 길일 수도 있다. 의학에 있어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환자의 질환에 대해 평소 식습관과 수면습관, 직업적 특성에서 오는 생활 자세 등의 질의응답을 통해 환자 스스로 자신의 질병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과정은 소크라테스가 택한 변증법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인간의 학문인 의학이 인간의 사상적 토대인 철학과 기본 토대와 다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통증의 원인과 치료의 방법을 찾아가는 의술은 귀납적이기에‘너 자신을 알라’하던 소크라테스 덕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비약일까.

장안의 화제인 가왕 나훈아의 ‘테스형’이 소크라테스를 지칭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이돌 그룹의 온텍트 콘서트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공연의 퍼포먼스와 독보적 가창력은 다시 나훈아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나훈아 덕에 기원전 5세기의 소크라테스도 다시 소환되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가 남긴 명언은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라는 조언으로 이해되고 있다. 애초에는 고대 아폴로 신전 입구 현판에 새겨진 경구였다. ‘인간아! 깨달아라, 너는 신이 아님을’이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를 통해 경구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리고 나훈아를 통해 더더욱 유명해졌다. 노래의 힘이다. 

선동과 신성모독 죄로 시민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고희의 나이에 감옥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독배를 마시기 전, 제자 플라톤에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오묘한 경고의 교훈, ‘너 자신을 알라’의 명제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훈아의 노래 말처럼 ‘모르겠소, 테스형’일까. ‘내 탓이오’ 보다 ‘남 탓이오’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코로나19로 다시금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는 지금, 되돌아 볼 일이다. 

안태환 프레쉬이비인후과의원 강남본원 대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