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살면서 제 이름을 스스로 부르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나르시시즘에 도취한 존재가 아니고서야 곰살 맞은 형용사까지 접두에 붙여가며 말이다. 넉살 좋게‘친절한 태환 씨’로 호칭하는 나를 독자들은 자아도취라고 힐책할지도 모르겠다. 정녕코 극도의 자기애에 빠져 과시할 의도가 아님을 헤아려 주시길 당부 드린다.   

의료현장에서 진료는 환자의 통증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하기에 환자의 통증 호소에 따라 의사는 치료방법을 달리한다. 환자가 자신의 고통에 솔직하지 못할 때는 당연히 제대로 된 치료는 요원하다. 후배 의사들에게 틈만 나면 누누이 강조해온 이야기, 환자의 통증에 귀 기울이며 깊은 공감과 측은지심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의사의 기본 자질이어야 한다. 그럴 때 의사는 낮은 자세이지만 존중받는다. 
 
연세가 드신 환자들은 대개 동네 단골 병원과 주치의 같은 의사가 존재한다. 오래된 친밀감에서 오는 심신의 평안도 그러하고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의사로부터 최선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필자의 모친도 그러하시다. 예외 없이 누구나 아프면 병원을 가고 치료를 받는다. 큰 병이 아닌 이상 동네의원을 찾는다. 의사와의 교감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명제이지만 국민 건강의 보루는 지역의료이다.

생각해보라. 접수 후 번호표를 들고 긴 대기시간 동안 대개의 환자들은 지치거나 참지 못할 통증이 있는 경우에는 병원이 야속하기까지 할 것이다. 기다림 끝에 들어선 진료실에서 마주한 데면데면한 표정의 의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불편함 마음에 통증까지 겹쳐 절로 얼굴이 찌푸려 질 것이다.

반면, 두 손을 내밀어 환자의 손을 잡아주며‘아프신데 오래 기다리셨다’며 밝은 표정으로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의사를 만난다면 어떻겠는가. 기다림에 지친 짜증은 가라앉으며 마음의 문은 활짝 열릴 것이다. 내 마음과 통증을 의사가 교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의사는 환자 스스로 질환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을 가진 의사이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 오래된 관계처럼 편안해지면 환자는 질환의 히스토리는 물론, 치료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준다. 참된 진료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럴 경우 환자의 치료는 예후도 좋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질환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주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의사는 환자에게 현재의 의료현실에서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는 진료시간은 자명종 시계처럼 째깍거린다. 기다리는 환자를 생각하자면 마음은 급하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은 앞에 앉은 환자의 통증에 온전히 충실해야 한다. 환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친밀감을 더없이 형성해야 한다.

공감 없는 치료는 의술이 아닌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에 대한 불신은 치료 효과도 난망할뿐더러 환자의 병을 깊게 만든다. 이를 제어하는 가장 좋은 치료의 시작은 의사의 친절함이다. 

가을을 지나 속절없는 계절은 우악스러운 감염병과 감기까지 동반한 겨울로 진입하였다. 대기실 환자들의 기다림도 길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환자들에게‘친절한 태환 씨’로 불려 지길 소망하는 이유, 참된 의사의 길을 여전히 찾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