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신년 벽두, 눈시울을 붉히며 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보았다. 칸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작품이라 일찍 감치 보겠노라 점찍어둔 영화였다. 믿고 보는 켈 로치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화 속 주인공 ‘리키 터너’는 건설 현장에서 안 해본 일이 없는 노동자이다. 기반 공사, 배수 공사, 굴착은 물론이고 바닥 작업, 판석 깔기, 심지어 무덤 파기까지 그는 늘 가족을 위해 살아온 성실한 가장이다.

그러던 그가 벌이가 더 좋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이끌려 혼자 하는 일을 택한다. 택배기사였다. 가정방문 요양사 아내의 차까지 팔아 소위 영끌해서 구입한 택배 지입차량은 그의 온전한 삶의 전부가 된다. 리키가 택배 회사 간부와 면접을 보는 영화의 첫 장면은 켄 로치 감독의 전작인 그 유명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첫 장면과 자연스레 오버랩 된다. 이 양반 메시지는 늘 불편하지만 걸출하다.  

영화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수취인 부재 중일 때 택배 기사가 남기는 고객에게 전하는 메모이다, 어림짐작이지만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택배기사 리키에 대한 사회적 미안함을 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는 택배기사의 일상을 따라 흐른다. 잘 알려진 대로 개인사업자 형식을 지닌 직업이 택배기사이다. 일하는 만큼 수당을 받는 임금구조이다. 쉴 새 없는 리키의 노동은 비로소 이해가 된다. 

한국의 리키들도 그러하다. 코로나19 시대를 살며 택배기사들에게 재택근무는 남의 일이며 아프면 쉬기, 거리 두기 같은 방역 수칙들은 그들의 삶과 전혀 무관하다.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배송은‘더 빨리’가 대세가 되었고 조금이라도 늦어질라 치면 고객의 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과로사와 생계 문제로 올해 택배 노동자 16명이 그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심근경색, 뇌출혈, 심장마비라는 사인 뒤에는 주당 평균 72시간에 달하는 장시간의 근무와 새벽까지 이어지는 심야 노동, 아파도 쉴 수 없는 환경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의 가슴 아픈 노동의 그늘은 이제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다. 

한국 사회 택배의 대명제가 되어버린 ‘오늘 주문, 내일 도착’은 세계에서 빨리빨리 문화의 선도자인 우리만의 물류 시스템이다. 많은 이들이 ‘비대면’이라는 생존 대안을 선택하면서 지난 일 년 동안 최소한의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이 작동했던 이유는 리키와 같은 택배 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차이는 없겠지만 영국은 노동인권이 양호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했다. 한국 사회 알려진 택배 노동자의 규모만 5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고된 노동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성실하고 튼튼한 육체를 지녔지만 가장으로서의 자존감 강한 리키와 더불어 영화는 가정 요양사인 그의 아내 애비의 애환도 그려낸다, 그녀가 일하는 요양사의 과정에서는 사람의 체온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애비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인을 진심으로 보살핀다. 힘겨운 직업이지만 모든 노인을 부모처럼 보살핀다. 아프고 노쇠한 노인들은 애비에게 무한 신뢰를 느낀다.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의료진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에 환자들이 보내주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켄 로치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보다 더 직설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켠,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열악한 노동구조 속에서 한 가족의 몰락 위기는 먼 나라 영국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직시해야 될 진실이다. 이것이 영국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지 않은가. 

전제된 배송 기일이 다소 더디더라도 택배기사에서 재촉하는 전화를 하지 않는 일, 기다려 주는 일, 무거운 짐을 부칠 때 손잡이가 있는 박스에 포장하는 일, 병원으로 오는 택배기사에게 “기사님 고생 많으세요. 고맙습니다.” 사람의 언어 한마디, 그런 최소한의 예의를 가지는 일, 그것이 저마다의 위치와 자리에서 일하며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간의 연대의 정신 아닐까.

‘미안해요, 리키’에 담긴 일상의 부끄러움이 민낯의 아름다움으로 더 널리 공유되도록, 오늘은 SNS에 영화 포스팅을 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