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공모에서 수필 부문에 당선된 최우인씨.
'제2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공모에서 수필 부문에 당선된 최우인씨.

 

아린(芽鱗)

 

초겨울, 나무의 뼈가 앙상하다. 푸른 하늘을 몸 안에 들인 채 여백으로 완성된 나무가 새로운 풍경으로 서 있다. 얼마나 버리고 지웠으면 저토록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한때는 연두와 초록, 노랑과 주홍으로 치장하기 바빴던 나무다. 잎으로 풍성하게 채워져 있었을 때는 그저 아름답거나 창창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던 나무다. 그러나 색이 빠지고 드러난 본모습에는 경외감이 서려 있다. 빈 가지 사이로는 바람이 드나들고 햇살이 머물며 달빛이 쉬어간다.

앙상한 가운데에서도 나무는 의연하다. 거리낌 없이 온 세상에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놓고도 너볏하다. 그중 참나무 한그루가 홀연 돌올하다. 형태가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탄한 세월을 보낸 것 같지 않다. 커다란 몸통은 부러지고 곁가지 하나만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몸통이 큰 걸 보면 수령이 적지 않을 듯하다. 여러 군데에 뭉쳐있는 옹두리는 푸른 시절 가지가 풍성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 가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둥치가 텅 비어있으니 속을 앓았을 듯, 나무의 틀거지를 보며 전성기의 사계를 짐작해본다.

죽어 있는 것처럼 고요해 보이지만 분명 살아 있다. 나무가 전하는 생의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고 있음이다. 수피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나무 앞에서 불현듯 어머니가 떠오른다. ‘뼈에 구멍이 숭숭 나서 바람이 뼛속에 집을 지었나 보다.’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바람결에 실려 온다. 어쩌면 나무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도 어느 순간부터 가벼워지기 시작했는데, 비움이란 바람을 몸에 들이는 일이었나 보다.

나무의 견딤 속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친다. 해발 960m의 진고개 정상에서 마주한 나무, 그 나무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들은 벌써 초연히 겨울을 맞고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나무의 속살에 깃든 생명의 빛을 마주하고 있다.

주변은 온통 회색이다. 흐름을 거부할 줄 모르는 숲은 회색빛 휘장을 내다 걸었다. 유채색에서 무채색으로 건너가는 긴 여정 속에 누런 풀들과 잿빛 나무만이 희미한 색을 발한다. 그런데 웬일인가. 풀숲에 초록이 보인다. 작은 대나무처럼 생긴 조릿대다. 퇴색하고 있는 색들 사이에서 몸을 낮춘 채 웅크리고 있는 초록이 생기롭다. 숲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어찌하랴. 비바람을 막아줄 가림막이 없으니. 차라리 눈이라도 소복소복 내렸으면 좋겠다. 저 여린 생명을 포근하게 감싸주었으면 싶어서다. 아린(芽鱗), 그래 아린처럼 말이다. 아린이 있다면 겨우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린은 나무의 겨울눈을 싸고 있는 비늘 조각이다.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이랄 수 있다. 그 모양이 어머니가 아기를 업고 있는 포대기를 연상시킨다.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겨울에 생체 에너지소비를 최소화해야 한다. 생장점인 새싹의 잎눈과 종을 유지하는 꽃눈이 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린은 겨울눈인 잎눈과 꽃눈을 보호하고 있다가 봄이 되어 싹이 트기 시작하면 떨어져 나간다. 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버텨낼 수 있는 건 자연의 오묘한 조화 덕분이다. 싹을 틔우고 성장했다가 다시 떨어지고 새잎이 나오는 불변의 세계, 숲은 그렇게 선순환을 하며 생사를 넘나든다.

지난여름이었다. 아침햇살을 받은 숲길에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옅은 안개가 무대 위에 퍼져나가듯이 자욱하게 숲을 덮었다. 수증기는 나무를 씻기는지 서서히 숲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러자 녹색의 잎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다래나무, 층층나무, 산목련, 아카시 나무 등이 말간 얼굴로 햇볕을 받는 모습은 신비롭기 이를 데 없었다. 숲이 일으킨 바람은 마을의 탁한 공기까지 말끔히 헹궈냈다. 숲이 선물한 아침 풍경이었다. 거대한 숲도 결국은 조그마한 생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린이 겨울눈을 지켜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무에 아린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보호막이란 게 있다면 겨울이 조금은 덜 황량할 것 같다. 뜻하지 않게 불어 닥친 전염병으로 인해 더 삭막해지는 겨울날, 나무를 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전염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세상이, 사람이 점점 외딴 섬처럼 변해간다. 섬 속에 고립되어 버린 사람들, 황량한 도시의 삶이 더 삭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도시에 살았더라면 나 또한 지금쯤 외로운 한 점 섬으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산촌이다. 그리고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몇 년 전 도시에서 살다 강원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마을을 둘러본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이제껏 본적이 없는 독특한 가옥구조였다. 집은 하나같이 대문과 담이 없었다. 도시에서는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담과 대문이 없는 마을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했다. 또한, 그건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때 문득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깨달음, 외로움이라는 단어였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우면 애초에 선을 긋지 않았을까.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고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라고 정호승 시인은 노래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이유도 외로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 사람에게는 사람이 아린인 셈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누구나 예상치 못한 아픔과 고통을 맞닥뜨린다. 그럴 때 진심으로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혹한의 추위쯤 아무것도 아니다. 겨울눈이 아린으로 인해 생을 유지하고 세상을 밝히듯이 사람도 누군가로 인해 눈빛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겨울 산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 생명이 숨어 있다. 가을에 떨어진 잎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나무는 서로를 의지하며 찬바람을 견딘다. 나무마다 아린이 품고 있는 겨울눈, 소생의 씨앗들이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내게는 벌써 초록이 번져가는 봄이 보인다. 겨울 속에서 느끼는 생의 기운, 아린의 따뜻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