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에서 수필 부문에 당선된 송종태씨.
'제2회 글로리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에서 수필 부문에 당선된 송종태씨.

 

다시, 빗속으로

 

비가 내린다. 정적을 깨고 소란스레 지붕과 마당 그리고 숲을 깨운다. 화음도 제멋대로, 음률도 무시한 불협화음이다. 하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솔바람 소리 들리고 사열하는 의장대의 발놀림처럼 장쾌함이 있다. 처마 밑을 두드리는 낙수까지 거들면 절묘한 하모니로 인생 드라마 주제곡을 들려주듯 심금을 깨운다

가뭄 끝자락에 단비가 산천을 적신다. 메트로놈을 매단 듯, 피아니시모로 시작하더니 포르테로 흐르고, 포르티시모로 바뀌더니 비바체로 빠르게 흐른다. 비 내리는 들녘에 서면 나는 음률을 조율하는 지휘자가 된다.

 어린 시절, 툇마루에서 턱을 괴고 마당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고는 하였다. 동화 속 줄거리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스러졌다가 생성되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정착지까지 무사히 항해하기를 기도하였다.

청년 시절에도 비는 절친한 벗이었다. 소낙비 속을 거닐며 사색에 젖었다.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방황하면서 어두운 현실을 탓하고 신께 따져 묻기도 하며,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살려 달라고 몸부림쳤다.

비는 시련기에도 함께 하였다. 작은 공장을 시작했다. 의욕과 현실은 좌충우돌 부딪히며 협곡으로 추락하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일어나 걸어보지 못하고 늪에서 허우적댔다. 절망의 나락에서 이슬비는 피아니시모 음률로 삶의 옷자락을 어루만지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였다.

동산에는 큰 바위가 서낭당처럼 마을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 바위를 산모롱이 찻집이라 이름 짓고 힘들 때마다 바위에 올랐다. 산모롱이 찻집에 비가 내리던 날, 연로하신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떠오르고 빗물은 눈물과 뒤엉켜 입안으로 찝찔하게 흘러들었다. 빗속으로 장송곡을 울리며 상여가 지날 때, 젖은 만장은 질퍽한 길을 터벅이며 나의 육신을 이끌고 갔다.

실패자로 남지 않으려 학업을 시작하였다. 학비 마련을 위해 밤이 이슥하도록 가게를 돌며 쓰레기를 수거하였다. 장맛비를 맞으며 며칠 밤을 새우고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 오열과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설상가상 약 사 먹을 돈마저 없었다. 비를 낭만으로 알고 세상을 가벼이 여긴 대가는 참담했다.

다시 일어섰다. 의욕과 열정으로 직장과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가정을 이루고 세 자녀도 두었다. 다복한 꽃이 피고 행복의 새가 뜰 안에서 노래했다. 모든 일은 의지대로 이루어지고 나는 거침없는 돌진만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신의 선택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터전은 물이 고갈되고 삶은 기근에 시달렸다. 끊길 듯 배앓이가 시작되더니 급기야 위암 판정을 받았다. 위암이 추락의 시발점이 될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열망의 불꽃이 사위어 갈 때 직장은 자리다툼의 터로 변질되었다. 혼신을 다해 쌓아 올린 탑은 무너져 내리고 희생양이 되어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밤거리는 유황불로 번뜩이고 정신은 혼미해 갔다. 천 길 벼랑 앞에 섰다. 막바지 외길로 똬리를 튼 꽃뱀이 혀를 날름대며 막아선다. 뒤돌아보니 온 길이 아득했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위기에서 길을 잃었다.

적의 찬 울분으로 무작정 길을 나섰다. 다다른 곳은 깊은 산속 산장이다. 밤이 되자 별마저 숨고 어둠뿐이다. 스산한 바람이 골짜기를 스치자 야음을 틈타 소낙비가 밀려온다. 적막을 깨고 함성을 지르며 산장을 덮친다. 선잠 깬 아기의 자지러진 울음이 몸 안에서 그닐거린다. 숲은 한차례 경기를 하더니 이내 고요하다.

소낙비의 도발이 다시 시작된다. 어두운 하늘이 번쩍이고 고막을 찢는 천둥이 울리자, 산장을 집어삼킬 듯 폭우가 쏟아붓는다. 나무는 쉬쉬 숨을 몰아쉬며 휘어져 까무러치고, 산장은 폭우와 뒤엉켜 신음을 한다. 괴기한 음향이 들려오고 죽은 자들이 묘지에서 일어나 무리 지어 춤을 춘다. 죽음 앞에 섰다. 죽음의 사신과 함께 살풀이춤을 춘다. 팔과 다리를 휘젓는다. 육신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린다. 숨이 차올라 풀숲에 주저앉았다. 땀과 비에 흥건히 젖은 몸이 널브러진다. 들끓던 증오와 분노가 풍선 속 공기처럼 맥없이 빠져나간다.

광란의 밤이 지나고 햇살이 드니, 몸이 한결 가볍다. 숲은 싱그럽고 아침 하늘은 쪽빛이다. 갈잎에 매달린 은빛 이슬이 햇빛에 아롱지고 산새가 앙칼진 목청으로 햇살을 쪼아대니 비바체 곡조가 계곡을 따라 경쾌하게 흘러내린다.

새 한 마리가 숲을 차고 날아오른다. 비바람을 타고 춤판을 누비며 헤맨 세월이 허공에 나부낀다. 끊어질 듯이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지고 응어리진 종양이 녹아내린다. 숨 졸이며 살아온 삶의 무게가 깃털처럼 한결 가볍다.

소낙비 한 줄금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제 몸을 파열하여 한 폭 수묵화를 치고 돌체 음향은 산장 사위를 맴돌아간다.

소낙비의 절규는 애절한 외침이었다. 병든 영혼과 육신을 껴안은 채, 제 한 몸은 기꺼이 아스러지고.

빗속에서 펼치는 인생 드라마는 지금도 방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