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뉴질랜드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환태평양 섬나라이다. 삼십대의 열혈청춘에 배낭여행 길, 뉴질랜드의 풍치에 빠져 눌러 앉기로 작정한 오랜 친구의 근황이 페이스 북을 통해 전해져왔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일요일의 여유를 공원에서 한가로이 만끽하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은 마냥 평화로웠다.

지난해 11월 18일 이후 확진자 제로 상태가 지속되고 있어 코로나 종식단계에 이른 국가로 평가되는 뉴질랜드는 지금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롭다. 

돌아보면 코로나19 창궐 당시, 일찍부터 강력한 방역에 나섰던 결과일 것이다. ​방역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덕분에 뉴질랜드는 가까운 이웃나라 호주와 함께 2주간 자가 격리와 검역을 실시하지 않고 양국 간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는 트래블 버블을 도입한다고 한다. 마냥 부럽기만 한 뉴질랜드의 코로나19 상황은 광활한 대자연 속 인구분포의 특성과, 국민들이 초기 골든타임에 잘 따라준 여건이 작동한 결과라고 짐작된다. 뉴질랜드 인들의 자유는 그래서 더 달콤할 것이다. 

​우리는 뉴질랜드 시민들처럼 언제 즈음 마스크 없는 일상을 살게 될까. 이 겨울, 눈 온 거리를 사뿐사뿐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에서, 즐겨 찾던 음식점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손 소독제는 언제 사라질까, ‘출입을 허하노라’라는 개인 정보 작성의 의무로부터 언제가 되어서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저녁이면 사랑하는 이들과 망설여지지 않는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을까, 이러한 그리운 염원이 많아질수록 우리를 괴롭힌 감염병의 시대는 참으로 고약하다.

그러고 보니 우린 너무 오래 그런 사소한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는 타는 목마름이다. 그러나 군중 속 밖은 여전히 위험하다. 

얼마 전 보았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영화 ‘조조 래빗’ 속 소년의 자유도 그랬다. 유대인은 혐오스러운 존재이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민족이라는 인종차별적 말들을 달고 사는 소년 조조. 그는 이제 갓 10살이다. 끔찍한 나치즘을 외치기엔 너무도 연약하다. 조조는 히틀러의 호위무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열심히 나치즘 교육을 받는다. 또래 아이들처럼 무리에 속하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지만 그게 잘되지 않는다. 몸도 약하고 심약하기 때문이다. 작은 동물을 쉽게 죽이는 친구들이 조조를‘겁쟁이 토끼’라고 놀린다. ‘조조 베츨러’는 그렇게 영화 제목인 ‘조조 래빗’이 된다. 그런 조조에게 집 밖의 자유는 도달할 수 없는 동경과 그리움이다.

친구도 없고 집에만 웅크리고 있던 조조에게 새로운 비밀 친구가 생긴다. 조조 집 벽장 속에 숨어 있던 누나 잉거의 친구인 유대인 소녀 엘사이다. 조조는 겁에 질려 칼을 쥐어보지만, 유약한 몸과 마음마저 나약한 조조는 엘사를 차마 죽이지 못한다. 

전쟁의 포성과 공포 속에 문밖에 나가지 못하는 둘은 서로 먹을 걸 나누고 얘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둘로 나누는 법만 배운 조조에게 엘사는 공감과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조조는 이를 통해 전쟁과 혐오뿐인 세상엔 다른 자유와 평화가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깨닫는다.

소년 조조는 비로소 혼자만의 전쟁에서 동지를 얻게 된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의 끝이 보이고,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집 밖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조 래빗’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도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 나뿐일까.

너무도 가혹한 거리 두기의 시대, 모두가 저마다의 삶 속에서 때론 이기적인 것이 생존의 방법이라고 우매하게 믿고 살던 우리였었다. 그러나 타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일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새삼 기억하게 만드는 이야기, 영화‘조조 래빗’을 닫힌 사회,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리운 시대에 나지막이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