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영화 덕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시네필 (Cinephile) 축에는 낀다. 무미건조한 삶에 있어 영화가 주는‘FEEL AS IF’의 만족감은 이름난 맛집에서의 식감이다. 동사의 과거형인 ‘AS IF’에는 세상의 모든 직업을 대입할 수 있으며 아바타화 된다. 움직일 시공간이 적어지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상의 모든 상상과 이야기들을 담아낸 영화의 매력은 더할 나위 없이 오묘하고 신비롭다. 
     
누구나 보았을 아니면 들어보았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에 대한 아픈 기억만을 골라서 지워준다는 회사‘라쿠나(Lacuna)’를 찾아간 조엘. 그러나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조엘은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함께 한 행복한 기억들을 지우기가 더더욱 힘겨워진다. 애당초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는 자체가 과한 설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가슴 설렘의 기억을 소멸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조엘의 사랑은 다시 기억된다. 

영화는 도입부터가 기묘하다. 제목은 영화 시작 18분 후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미국 북동부 뉴욕과 보스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기찻길 옆과 시내 구석구석의 풍경들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나와 같은 ‘라떼’들에게 뉴욕의 겨울은 한때 영화 ‘러브스토리’로 상징되었었다. 그 자리에‘이터널 선샤인’이 대체된 것이다. 그렇게 시대는 로맨틱 영화마저 변덕스럽다.

영국 BBC가 선정했다는 '최고의 멜로 영화'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지만 기존의 로맨틱 영화와는 결이 다른 영화인 점은 분명한다. 사랑의 기억이 영화의 주된 주제이지만 의학적으로 접근하여 직업적 소견을 피력하자면 인간의 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뇌에 대한 연구가 근간에 매우 활발해지고는 있지만 기억에 대한 의학적 성과는 아직 미완이다. ​역설적이지만 힘들고 아픈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이다. 모두가 힘든 기억을 없애려 하지만 트라우마는 극복의 대상이 아닌 관리의 범주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속 기억 제거 회사 ‘라쿠나’의 주소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나오는 사무실 주소와 똑같다. 두 영화 다,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이라서 그렇다. 영화 속 기억을 선별해서 지워주는 회사인 ‘라쿠나’는 라틴어로 ‘잃어버린 조각’이란 의미이다. 영화의 결말도 끝내 조엘은 사랑의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소실된 것이 아닌 잃어버린 조각으로 유실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라쿠나’라는 작명, 영화의 메시지를 다시 음미하게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유실된 기억은 언젠가 다시 재생된다. 그건 틀림없다. 

눈물겹고 힘겨운 기억이 주는 상처는 간단치 않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다고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기억하지 않는 게 아닌, 어쩌면 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도 이별을 대하는 제법 괜찮은 처세이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고자 존재한다. 사랑도 행복의 한 가지 방법이다. 이별 후에 가슴 절절한 존재가 있다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기를 권유한다. 구석진 방에 웅크리고 앉아 청승떨며 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모든 이별은 갇힌 기억의 시간을 강제한다. 그러나 분주한 일상 속에 망각의 위로는 반드시 온다. 폭풍 같았던 거친 사랑이라면 상대를 위해 오랜 시간 희생하고 인내했던 시간을 이제 자신을 위해 온전하게 할애하는 것도 괜찮다. 연애를 통해 잃어버린 존재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한걸음 떨어져서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면 조금은 더 성숙해진 자아를 구축할 수 있다.

영화처럼 누구나가 나쁜 기억 속에서 도망치

려 한다. 그러나 기억은 선별되지 않는다. 기억을 지울 수도 없지만 송두리째 소각된 기억은 살아 낸 인생의 부정이다. 가슴 아프지 않았던 청춘이 어디 있으랴. 기억은 기억대로, 슬픔은 슬픔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