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들어가는 글이 고지식하지만 도리 없다. 음식에 대한 역사를 논하지 않고서야 최애 음식 중 하나인 순댓국의 비범함을 써 내려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24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순댓국이 돼지 삶은 물에 내장을 넣고 기호에 따라 우거지와 함께 끓인 국으로 기록돼 있다. 순대는 돼지고기, 선지, 찹쌀이나 녹말가루, 숙주나물, 배추김치 등을 잘 섞어 양념한 뒤 돼지 창자에 넣고 끝을 묶어 삶아서 그 삶은 물에 잘라 넣어 먹는 음식이다. 손도 많이 가고 재료도 비범하다. 오늘날의 순댓국의 변하지 않는 밑천이다. 그 시절 귀하디귀한 음식이었지만 돼지 부속이 주재료이기에 특유의 잡내가 나 호불호도 명백하다.  

순대 국밥은 순댓국으로 끓인 국밥이다. 일종의 개량음식이다. 휘황찬란한 패스트푸드 점의 화려한 인테리어나 현대화된 순댓국집과 달리 시장판 순대 집의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순댓국에는 사람들의 음식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훈훈함이 그대로 서려 있다. 순댓국 특유의 그 비릿한 냄새는 비위가 약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피 음식이 되기도 한다. 순대, 돼지머리, 내장을 오랜 시간 고아질대로 삶아서 썰어 담은 머리 고기와 부속들은 식감은 좋으나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자칫 입천장을 데기 일쑤이다. 성질 급한 이들은 늘 당하는 일이다.  

순댓국집마다 다르겠지만 대게 고춧가루가 섞여진 소금이나 새우젓에 찍어 먹는 그 맛은 내장 부위마다 맛이 천차만별이다. 주인장이 뚝배기에 담아 주는 뜨끈한 순대 국물에 고추 다다기를 풀어서 밥 한 공기를 말라 치면 제대로 된 순댓국이 된다. 부추를 넣어도 좋고 잘게 썰어진 파와 마늘을 넣어도 좋다. 순댓국은 세상의 모든 채소들과 조화를 이룬다. 이기적이지 않은 음식이다.  

시시각각 주문에 따라 분 단위로 만들어지는 패스트푸드 점의 음식엔 노동의 애환은 있어도 정성스레 만들어지는 다정함은 없다. 누군가의 헌신으로 밤새 끓여낸 시장통 순대 집의 뽀얀 국물은 주인의 정성이 가득하다. 호흡이 길지 않고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국물이다. 밑반찬은 잘 익은 깍두기도 좋고 묵은지도 좋다. 반찬의 가짓수가 많지 않아도, 순댓국은 으레 그리 먹는 것이다. 시원한 깍두기를 앞니로 싹둑 잘라먹을 땐 청량감과 함께 입안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맛의 기운은 순댓국에서만 느껴지는 별미이다. 돼지 부속 특유의 잡내에서 오는 느끼함도 어느새 가라앉힌다.

순댓국을 처음 접한 것은 의대 1학년 때였다. 서울 행당동 한양대 병원 건너편 골목길에 위치한 오래되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국물은 식당의 역사만큼이나 긴 호흡으로 맞춰냈기에 내공 깊은 맛을 낸다. 가게 근처에서 진동하는 그 꼬릿한 향은 미각으로 승천하여 국물에 다 녹아들어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정신없이 먹다 보면 입술도 절로 찐득해진다. 그만큼 국물이 진하다는 증거이다. 사골국물의 원조 격이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몸과 마음이 허할 때는 자연스레 그리워지는 맛이다. 입맛이 없을라치면 또 찾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끼니를 위해, 때로는 사랑하는 이들과 소주 한잔의 위로를 위해 그 집을 찾았을 수천 명의 학생들의 추억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성업 중이다. 순댓국은 그렇게 사람의 인생과 함께 뽀얀 국물처럼 농익어 간다.

아스라한 봄날을 목전에 두고 권태감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지친 일상이라면 순댓국에 밥 한 공기 말아 식도를 타고 넘어 들어가는 소주 한 잔으로 위로 받아도 좋겠다.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지인과 오늘은 병원 인근 순댓국집을 찾아야겠다. 태양초 알싸한 고춧가루로 다진 양념에 더해 청양고추까지 넣어서 매운맛으로 먹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