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전(前)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전(前) 국민일보 주필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을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권세력의 논리가 그렇고, 그 주변 인사들의 주장이 그렇다. 검찰청법 제8조의 취지는 장관의 권한을 확인시키자는 게 아니라 장관의 수사 불개입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정무직인 장관이 개입하면 수사의 독립성, 정치적 중립성은 심각히 훼손된다. 그래서 꼭 간여해야 할 사정이 있으면 검찰총장을 지휘하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 충성스런 참모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인권’이 심대하게 침해될 경우가 그 ‘사정’에 해당할 것이다. 범법자를 두둔하고 범죄를 조장하는 식으로 수사가 진행된다는 객관적 증거나 정황들이 드러날 때(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믿지만)도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좌파 정치리더들의 한명숙 집착

그런 게 아니라면 검찰 몫의 수사는 검찰총장의 지휘에 맡겨야 한다. 수사에 관한 한 총장이 전문가이다. 임명과정도 더 까다롭다.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 추천과 법무장관의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물론 확고한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된다. 장관보다 총장이 더 먼저 국회인사청문회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추미애 법무장관 전에는 단 한 차례 수사지휘권 발동 사례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천정배 장관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당시)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지시했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이를 수용한 대신 항의의 뜻으로 자리를 버렸다. 이 조심스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지휘권을, 추 장관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취임 10개월도 채 안 돼 두 차례, 특히 작년 10월의 경우 5개 사건에 대해 무더기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그야말로 칼춤을 춘 것이다. 그 모두가 윤석열 검찰총장(당시)을 수사 지휘 라인에서 배제하는 지휘였다. 검찰총장을 통해 수사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게 법 규정인데 총장을 수사에서 배제하는 지휘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추 장관은 윤 총장을 직무에서 배제시키고 2개월 정직의 징계를 하는 데까지 갔다. 그 무모한 권세 자랑이 결국 자신의 퇴진을 초래했다. 

그런데 그 후임 박범계 장관이 17일 또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모해위증 의혹 사건’에 대해서다. 그는 ‘대검 부장회의’를 열어 혐의 유무 및 기소가능성을 심의하고 임은정 검사 등으로부터 의견을 청취하라고 지시했다. 한 전 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수사 과정에서 수사팀이 재소자들의 위증을 사주했다는 주장되는 사건을 대검 부장들이 논의해서 기소하라는 의미의 지휘다.

문 대통령 허락 없이 지휘했을까

황당한 노릇이다. 이미 형이 확정되었고 한 전 총리도 진작 형기를 채웠다. 게다가 대검이 지난 5일(윤 총장 사퇴 다음날) 이 사건 관련 전‧현직 검사 16명에 대해 혐의가 없다고 종결처리한 사건이다.

그런데 대검이 이 사건 조사를 담당해 온 한동수 감찰부장과 임 대검감찰정책연구관을 최종 판단에서 배제했다. 합리적 의사 결정이었다고 할 수 없는 만큼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 다시 판단하라는 게 박 장관 지휘의 요지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일인 22일안에 해당 검사들을 기소하라는 지시라고 하겠다. 

한 전 총리는 좌파 정치세력의 대모로 지칭돼 왔다. 그를 각별히 받드는 사람 중엔 문 대통령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의 이력을 깨끗이 세탁해 주고 싶은 듯하다. 정권의 실세들은 그러는 것이 자기들 대모에 대한 도리고, 이념적 동지들에 대한 의리라고 여기는 인상이다. 집권을 해서도 그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 자기들 그룹 내에서 죄인이 되고 만다는 강박감에 휘둘리는 지도 모른다. 

박 장관이 ‘우리는 하나다’라는 동지 의식을 가져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총리의 신원(伸冤)을 위해 추 전 장관이 망신만 당한 그 칼을 다시 꺼내든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이 경우엔 아무래도 하수인의 이미지를 털어내기 어렵다. 문 대통령의 지시나 허락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장관 자리 값을 치른 셈이겠는데 어설픈 마리오네트를 보는 것 같아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집권세력에 대해서는 정말 무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제도‧관행을 철저히 정권 편의적으로 재구성‧재해석하는 만용에 기가 질린다. 권력을 영원히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국가 주요공직과 제도를 사적‧집단적 이익 확보 및 수호의 수단으로 이용하면 민주주의는 회생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건 민주정치사에 죄를 짓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릇된 행동을 멈출 줄 아는 것도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