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전(前)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전(前) 국민일보 주필

문재인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정권처럼 태연히, 자신들이 비난해 마지않았던 구태(舊態)를 답습하고 재연하는 사람이나 정권이 일찍이 있었을까? 기억이 가 닿는 한에는 그런 예가 없었다. 이야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나라다운 나라’다. 몽환적 상상이었다는 뜻에서 그렇다. 그러니 현실에서의 자기 과오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23일 오전으로 예정됐던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대한 첫 재판이 다음달 13일로 미뤄졌다고 해서 여성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오 전 시장은 작년 4월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여직원 성추행 사실을 고백하면서 사퇴 의사를 밝힌 후 총총히 사라졌다. 언론들도 그 행적을 추적하는데 실패했을 정도로 그는 교묘히 피해 다녔다. 

오거돈 수사‧재판 부지하세월

경찰은 작년 8월 15일 이 사건 수사를 마치고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이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힌 것은 지난 1월 28일이었다. 가해자가 성추행 사실을 기자회견까지 열어 고백한지 9개월이나 되어서야 기소가 이뤄졌다. 첫 재판은 그로부터 2개월 가까이 지난 23일로 예정됐었다. 그런데 그게 또 미뤄진 것이다. 

“성범죄 사건은 피해자 중심의 신속한 대응과 수사가 원칙임에도 수사를 1년여 가까이 지지부진하게 끌어온 것도 모자라 또 다시 공판기일을 변경했다. 누구를 위한 공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산여성100인행동 등은 24일 오전 부산지법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법원의 결정을 규탄했다. 

사법처리 절차가 이처럼 지지부진하게 늘어짐으로써 피해자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악몽에서 벗어나야 할 피해자를 수사당국과 법원은 외면한 것이다. 

오 씨는 작년 4‧15총선을 피해 8일 후인 23일에야 성추행사실을 시인했다. 선거 전에 그랬더라면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엄청난 표를 잃었을 수 있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표를 지켜준 공로를 높이 산 것인가. 도무지 수사나 재판을 다잡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것을 ‘조폭적 의리’라고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번 재판 일정 연기도 4‧7재보선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 씨 변호인 측 요청을 법원이 수용했다는 것인데, 이를 결정한 재판관이 정치적 고려를 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된 날짜도 공판일이 아니라 공판준비기일이라고 한다. 공판 개시일은 그 때가서 정하자는 것이다. 

오 씨의 사건이 터져 나와 온 나라 안이 시끄러웠던 시기에도 자신의 여비서에 대한 성추행을 멈추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7월 9일 자살을 함으로써 법적 책임을 피해갔다. 박 씨는 피해자가 자신을 고소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극단의 선택을 했다. 

임종석의 황당한 박원순 예찬

그가 속했던 민주당으로서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이해찬 당시 당 대표는 서울시장으로 치러진 박 씨 장례행사의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그는 이 사건에 대한 당의 입장을 묻는 기자를 노려보며 이처럼 호통을 쳤다. 민주당은 국회 앞에 “고 박원순 시장님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님의 뜻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2015년 당 소속 선출 공직자의 중대한 범죄행위로 실시되는 보궐선거에는 후보 공천을 않기로 당헌을 개정했던 민주당이다. 그 때 당 대표가 문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후 보궐선거에서 이를 자랑하며 경쟁정당에 맹공을 가했다. 그런데 작년에 민주당은 이 당헌을 고쳐 후보 공천의 길을 열었다. 문 대통령이 적극 반대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다.

민주당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울시장 후보로 박영선, 부산시장 후보로 김영춘을 공천했다. 그리고 이들은 국민의힘 후보들을 상대로 온갖 의혹을 제기하며 추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선거철에는 과도한 비방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입을 다물어야 할 텐데, 더 악착같이 소문이나 의혹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선거에서는 이기는 게 선(善)이라는 자신들의 경험칙을 신봉한다는 뜻일 터이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전이 가열되는 와중에 뜬금없이 ‘박원순 예찬’을 들고 나왔다.

그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청렴이 여전히 중요한 공직자의 윤리라면 박원순은 내가 아는 가장 청렴한 공직자였다”고 썼다. 민주당 박 후보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24일에도 “안전한 서울, 깨끗한 서울, 걷기 좋은 서울이 시민의 새로운 요구였다”며 “박원순은 그런 요구에 순명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선거를 앞두고 이점에 대한 성찰과 평가도 이뤄져야 한다던가. 

야권 단일화 사후 관리도 중요

성추행 가해자에 대한 공공연한 미화를 현 정권의 전임 대통령 비서실장이 공개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이런 현상도 역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특성일 수 있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는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전에 편승해서 자기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라면 정권 실세들의 도덕적 불감증, 정의감의 상실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자신들이 국가 요직을 맡거나 정권을 이어가면(내년 대선을 통해), 이 땅에 결코 도의와 정의는 구현될 수 없다고 웅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권과 그 실세들의 과오에 대해 사법적 징벌은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황당한 수사권지휘나 합동감찰지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게 그들의 생태와 한계다. 그러니 국민의 정치적 징벌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야권은 이제야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작업을 마무리했다. 약간의 곡절이 있었지만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23일 ‘야권단일후보로’ 확정됐다(부산의 경우는 박형준 후보가 진작 국민의힘 주자로 등판해 뛰고 있다). 남은 과제는 단합된 힘으로 보선 승리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정말 어려운 정당 간 후보단일화를 이뤄낸 만큼 보선에서도 단일대오를 지켜 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다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옛 사람들의 경구(警句)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단일화 이후의 상황 관리에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 서로 감정을 자극하는 말은 특별히 자제해야 한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 대한 평가가 단일화 후에도 너무 인색한 느낌을 준다. 기꺼이 단일화에 동참해서 ‘원칙 있는 패배’를 감수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를 표할 이유는 충분하다. 다시 야권 분열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여겨지지만, 글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