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前)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前)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 이젠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그림을 좋아하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공부했고,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선택해서 30년째 하고 있다. 긴 직장생활 동안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게 많다. 이제 몸도 지쳐 좀 쉬고 싶다.

몇 년 만 더하다 이 직업은 그만두고 은퇴할 계획이다. 은퇴 후에는 사진 작업에 몰입하고 싶다. 언젠가 나이 들어 하려고 아껴둔 것이 사진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은퇴 후의 시간이 기대되고 설렌다.

노년에는 길에 핀 꽃, 풀, 그리고 구름, 돌과 같은 것들에 시선을 마주하고 천천히 걷고 싶다. 비온 뒤 만들어지는 형상과 깊이 있는 색감처럼 여생의 시간이 짙어지고 싶다.

△ 가슴 떨리는 그 길이 당신의 길… 인생의 또 다른 봉우리를 만들어보자

나는 마지막 직장생활을 제주에서 했다. 무슨 복이 있어서 그렇게 풍광 좋은 곳에서 직장 말년을 보냈느냐고? 그냥 몸담았던 직장이 공공기관 지방이전으로 제주 서귀포의 혁신도시로 간 것이다. 그 덕에 2년 반 동안 그 섬에 있었다.

제주도에서 본 세상은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산과 오름, 들판, 바다와 하늘 그리고 풀, 꽃, 새, 돌, 구름, 안개, 바람은 축제의 무대를 펼쳐준다. 보이는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이고 사진이다. 그 섬에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라는 유명한 아트 겔러리가 있다.

제주의 풍광에 홀려 그곳에 정착해서 오로지 중산간 들녘을 필름에 담는 일에 전념하다 일생을 마친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어찌된 일인지 사진 속으로 옮겨진 풍경이 바깥의 실물 자연보다 더 아름답다. 작가가 손바닥만 한 창으로 내다본 세상은 나의 렌즈로 통해본 것과는 확실히 다름을 느꼈다.

마음속에 있는 카메라 앵글은 꿈과 희망이다. 여유로운 노년에 자기만의 창으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정말 아름답다. 카메라 한두 개 둘러메고 콧노래 부르며 흥겹게 돌아다니다보면 늙음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미지의 세계로 향해 가는 노년의 그 길은 결코 쓸쓸하지도 않다. 가슴 떨리는 일이 있는데 왜 쓸쓸할까. 오히려 젊음보다 짙고 푸를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 바람, 구름, 비, 안개.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이다. 대자연이 조화를 부려 내 눈앞에 삽시간에 펼쳐지는 풍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순간을 위해서 보고 느끼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되풀이해야 한다. 당신이 가는 그 길이 당신의 길이다. 노년의 꿈은 젊음보다 푸르다. 당신이 은빛나래를 펼치는 것을 응원한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산과 들을 헤매면서 사진 찍는 일이 힘 든다고 혀를 차며 안쓰러워할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제일 뱃속 편한 일 아닌가. 사진 찍는 일이 제대로 밥벌이가 안 되겠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먹고 살 것은 어느 정도 준비된 노년 아닌가. 별로 돈 되는 일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쉽게 달려들지 않아 경쟁력도 있다. 좀 더 프로답게 해서 약간의 수입도 올리면 금상첨화다.

“은퇴 후엔 전 그냥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지내는 게 꿈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젊었을 때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 그저 가만히 지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살기는 어렵다. 며칠 열심히 돌아다니며 콧구멍에 바람을 쐬고 나면 커피 맛도 더 좋아질 게 아닌가.

과거에는 외봉우리 인생이었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면서 20~30년이 지나면 대개 그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회사에서 중심 되는 자리에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을 걷다가 은퇴하고, 하는 일 없이 몇 년을 더 살다가 죽게 된다. 이것이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걸어온 외봉우리 형태의 인생경로다.

하지만 지금은 장수시대다. 은퇴하고도 20~30년 더 활동할 수 있다. 80~90세까지 일하는 지금 시대는 더 이상 외봉우리 인생이 아니다. 인생의 정상이 한두 번 더 만들어질 수 있다. 길어진 인생만큼 새로운 가능성이 더 늘어난 것이다. 은퇴 후 인생 2막, 내 인생의 또 다른 봉우리를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