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고종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영국 출신 존 헤론 선교사는 환자를 돌보던 중 전염성 이질에 걸려 34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1885년 당시, 그가 남긴 글에는 "조선 사람들의 절반은 천연두로 죽는다. 피부병과 무좀은 다반사이고 수술받은 환자들은 음주와 음식을 가리지 않아 그 예후도 좋지 않다”라고 한탄한 바 있다. 120년 전 우리나라 의료 현실이었다. 

1900년 이전,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35세 이하였던 나라가 세계가 선망하는 의료체계를 갖춘 나라로 변모되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도 부러워할 건강보험제도를 비롯하여 OECD 국가들의 평균 수명보다 월등히 높아진 장수국가로 도약했다. 2021년, 대한민국은 의료 강국으로 분명히 발돋움했다. 눈부신 의학 연구의 지대한 업적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임상시험 수준은 국가의 의료 인프라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임상전문가들은 국내 병원과 의료진, 그리고 임상시험 조건과 환경을 마냥 부러워한다.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우리나라를 임상시험 시장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자 서비스 역시 손색이 없어 국가 고객만족도(NCSI) 평가에서 대형병원들은 특급호텔보다도 그 순위가 높다. 

이런 비약적 발판에는 헤론 선교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의료인들의 헌신이 있었다. 세계 각국의 환자들이 우리의 선진 의료에 의탁하기 위해 찾아오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와 헤론 선교사가 흐뭇해하실 일이다. 

우리가 의료 선진국이라는 항간의 평가를 얻게 된 것은 저렴한 의료비가 큰 공헌을 했다. 더불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 환경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비급여 항목으로 창출된 수익은 의료 R&D에 재투자해왔다. 반면, 유럽에서는 건강보험 의료기관으로 지정을 받으면 비급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이른바 혼합진료가 가능한 대한민국이다. 그러니 비급여 진료 너무 욕하지 마시라.

펜데믹 이후 선진국들의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19 발생 현황을 보면, 1위 미국을 비롯하여 상위권에 유럽 국가가 다수 포진해 있다. 이른바 의료 선진국이라 평가받던 국가들의 공공의료정책의 민낯이다. 각국의 의료복지의 현주소가 들통 난 것이다.

여러 선진국이 코로나19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비교적 모범 방역국의 지위를 얻고 있다. 신속 진단키트는 세계에서 완판행진을 거듭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코로나19가 의심되면 집 근처 선별 진료소에서 아무 때나 검사를 받을 수 있다. 검사 결과도 문자로 알려준다. 세계에 이런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현재처럼 해마다 의료비가 증가한다면 건강보험 재정은 고갈될 것이 자명하다. 지금과 같은 의료보장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난망하다. 국민도 힘들고 의사도 힘들다. 전 국민 의료보장 국가이지만 장기적 의료 계획이 없는 국가는 우리가 유일하다. 의료 선진국의 그늘이다. 의료소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정책과 계획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부실하다. 

의료 선진국, 그 흔들리지 않는 위상을 위해 바뀐 시대상을 반영한 현실적 의료정책의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부도, 국민건강보험공단도, 의사협회도, 각자의 이해를 떠나 시급히 머리를 맞대야 한다. 미국과 유럽 국가의 악몽을 겪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