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원장.
안태환 원장.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하우징아는 저서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서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라고 역설했다. 통속적 의미와 단편적 사고로 논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들에겐 하우징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자유롭게 잘 놀던 사람들이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직업인과 경제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우리는 숱하게 목도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IT기업 구글(Google)을 들 수 있다. 1998년, 작은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 1뒤에 0이 100개나 붙는 큰 숫자를 뜻하는 '구골(googol)'을 잘못 입력해 추진하던 프로젝트에 '구글'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사명이 된 회사이다. 현재 구글은 온라인 비즈니스와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 주식 가치가 제너럴모터스와 포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거대 기업이 되었다.

구글의 전설적 성공신화에는 직원들의 창조성이 매출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무한한 창조성 발휘를 위해 구글은 사무실을 놀이터처럼 디자인했다. 노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속박 없는 환경은 구글 신화의 동력이 되었다.

근래 들어 우리 기업들도 구글의 일터 환경을 따라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른바 스마트한 지능보다는 자유로운 정서가 창의성 발휘에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노는 것이 경쟁력이 된 것이다.

굳이 이 글에서 종교혁명까지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논외로 하고 개신교 등장의 배경에는 관성적 매너리즘에 봉착한 가톨릭에 대한 반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개신교는 인간의 직업은 하느님에 의해 소명된 일로 여겼다.

이에 따라 노동이 곧 놀이라는 종전의 개념은 점차 소멸됐다. 노동이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은 개신교의 성장과 함께 더더욱 공고해졌다. 이른바 경직된 노동의 출현이다.

부모님 세대는 물론이려니와 우리 세대에서도 산업화 사회에서의 근면과 성실은 시민의 최고 가치였으며 사회적 책무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쉬거나 노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이른바 백수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으며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로 상징되는 일하지 않는 자는 산업화 시대, 공공의 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창조적 사고가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 시대가 아닌, 미처 남들이 못하는 생각을 해야 성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획기적 변화의 중심에는 자유적 창의성이 있다.

주입식 교육과 강제된 노동에는 창의적 사고가 태동할 틈이 없다. 기계적 인간으로서의 정형화된 노동이 있을 뿐이다. ‘호모 루덴스’로서의 놀이의 추구와 열정은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성을 드러내게 한다. 일을 하면서, 놀기도 함께 하는 노동,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짬이 나면, 인터넷을 통해 놀기도 하고 게임을 통해 놀기도 하는 젊은 일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세상 편한 스마트 폰을 통해 일을 하기도, 세상과 소통하며 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노는 것만으로도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른바 '유희적 자본주의'라 할만하다.

잘 놀면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환은 관성과 관행으로부터의 일탈 이후부터 가능해진다. 잘 놀고 난 후 느끼는 그 흥분감이 의식 저편의 창조적 자아를 깨닫게 해준다. 제대로 된 여가의 진정한 모습은 자발적으로 잘 노는 것이다. 우리의 칙칙한 일상에서 압박감 없는 멋진 여가를 만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신명 나게 노는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세상의 모든 놀이는 위대하다.

이 곤혹스러운 코로나19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를 대비해 잘 노는 방법을 강구하는 일, 상상만으로 행복하지 않은가. 우리는 호모 루덴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