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이 먹는 것을 용납할 수 없소. 나이 듦에 대한 이행유예를 선언하오. 노년이 되는 것을 20년만 미룰 것이니 그리들 아시게.”

60살에 벌써 노인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심리적 나이는 아직 청춘이고, 생물학적 나이도 건강증진과 수명연장으로 늙은이가 되기에는 너무 젊다. 사회적 나이만 오직 노인으로 분류된다. 몸과 마음이 건장한데 노인 행세를 할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주위의 나이든 사람들에게 너무 늙었다고 트집을 잡아서는 안 된다. 국가와 사회는 몸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옷을 개인에게 강제로 입힐 권리가 없다.

사실 나이는 우리가 기꺼이 따라야 하는 사회적 협약이다. 하지만 60세 정년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이것도 법상의 기준이지 실질적으로는 50세 전후에 이미 은퇴 압박이 시작된다. 나이 든 사람이 주요직책을 맡게 되면 늙은 나이에 꿀 보직을 즐긴다고 비아냥거린다. 왜 인생을 자기 능력이나 생각대로 살 수 없게 야단들일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그 나이가 아니다. 세월의 나이와 개인의 능력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많다. 세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2018년에 69세의 어느 네덜란드 사람은 서류상의 나이를 고쳐주지 않는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자기가 느끼는 나이는 49세인데 공식적인 나이 때문에 일과 연애에서 차별을 받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제 사람들은 나이 들었다고 착륙만 하지 않고 다시 이륙할 권리를 요구한다.

세월의 나이가 몇 살인지 그리도 중요할까? 젊다고 망령 들지 않는다는 법이 없고, 나이 먹는다고 꼭 철이 드는 것도 아니다. 생년월일은 노년을 분류하는 여러 변수 중에 하나이지 절대기준은 될 수 없다. 남자가 여자 되고 여자가 남자로 바꿔 살 수 있는 세상 아닌가? 노년이 소년처럼, 소년이 노년처럼 살면 왜 안 되는가?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서 커서를 마음대로 옮기듯이 나이도 바꿔가면서 살면 왜 안 되는가?

사회통념이나 고정관념은 깨지는 것에 발전이 있다. 생각을 안 하니까 관념이 고정되는 것 아닌가. 생각의 ‘건너뛰기’를 해야 한다. 점프개미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개미종족은 여왕개미가 사망하면 일개미 중의 한 마리가 여왕개미로 추대된다. 그러면 평범했던 일개미의 몸이 여왕개미처럼 커지고 수명도 열배 이상 늘어난다. 자신이 여왕개미라는 확신이 유전자조차도 바꿔버리는 것이다.

철저하게 세월의 연식에 적응되어온 우리도 ‘나도 청년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일개미가 여왕개미가 되듯이 나이에 불구하고 영원한 청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암묵적으로 합의된 노년에 관한 사회적 나이를 깨부숴야 한다. 이 나태한 합의가 이 시대의 베이비부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있다. 우리는 60대와 70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80대 이상의 나이에서도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나이에 관한 고리타분한 생각들이 우리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나이를 먹고 진중해지는 것만이 어른이 되는 길은 아니다. 이제 세월의 나이 따위는 던져버리자. 겉만 번지레한 짝퉁 젊음도 따라갈 것은 아니다. 매끈하게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에 검정 뿔테 안경, 흰색 차이나 칼라 셔츠 위에 감색 재킷, 발목이 살짝 보이도록 접어올린 흰색 바지까지. 보는 순간 힙(hip)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진정한 젊음이 아니다.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시기… 우리는 이 시기의 의미를 다시 깨우쳐야 한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인디언 서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디언들이 신의 선물로 감사히 여기는 늦가을의 사냥하기 좋은 따듯한 날씨처럼 인생에서도 늦은 시기에 새로운 성장을 하게 되는 시기다. 우리는 이 인생의 황금기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

이 시대의 중년들이여! 이제 더 이상 나이 들 수 없다고 ‘에이지 모라토리엄(age moratorium)’을 선언하자. 그래서 적어도 20~30년은 노년 이행 유예를 얻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