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륜 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오석륜 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내가 만난 홍수 혹은 장마의 기억은 여전히 공포와 슬픔이 지배적이다. 1984년 9월 초, 여름이 막바지로 치 닫을 무렵, 서울 풍납동에 살고 있었을 때 맞닥뜨렸던 집중호우와 관련한 기억은 아직도 쉬 잊히지 않는 슬픈 다큐멘터리 같은 것. 내가 몇 년 전 발표한 시 「장마」에는 그때의 공포와 공허함이 숨 쉬고 있다. 이 시편을 다시 펼쳐보는 것은 올여름에도 장마로 인한 아픔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가 계속되던 날/ 저지대에 모여 사글세 살던 사람들에게는/ 근근이 벌어오던 일당에 대한 절실함보다는/ 며칠 동안이나 낮은 곳으로만/ 낮은 곳으로만 흘러내리는 장대비의 방향이 더 무서웠다/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궁기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나가는 것이 더 무서웠다/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잠겨버린 골목길은/ 우리들 허리춤보다 더 높이 떠다녔고(중략)/ 장마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둥 또다시 일당을 찾아/ 빗줄기처럼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장대비에도 겨우 목숨을 건진 몇몇 해바라기와 잡초는/ 오히려 무성하게 자라 올라/ 가재도구가 떠내려간 공허함을 메우기도 했고/ 허름했던 집과 집 사이의 경계를 더 명확하게 해주기도 했지만/ 장마 피해를 조사하러 나온 관공서의 공문은/ 저지대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리고 돌아다녔다   
                                           -「장마」 일부 (『파문의 그늘』, 시인동네, 2018) 
      
 돌이켜보면, 급격히 불어난 빗물로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잠겨버린 골목길은/ 우리들 허리춤보다 더 높이 떠다닌” 것도 무서웠지만, “낮은 곳으로만/ 낮은 곳으로만 흘러내리는 장대비의 방향이 더 무서웠”다. 그리고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궁기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나가는 것이 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그때 홍수가 난 이후로, 풍납동과 인접한 성내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고지 배수로를 설치했다는 보도도 있었고, “장마 피해를 조사하러 나온 관공서의 공문은/ 저지대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리고 돌아다”닌 수재민을 위한 대책 수립의 선행작업도 있었다. 
 
 지금도 장대비가 내리거나 장마가 지면 여기저기에서 피해 소식이 들려온다. 피해의 경중을 떠나서 집중호우는 무서운 것이다. 그런 비의 방향이 더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은 낮은 곳으로만 낮은 곳으로만 향하며 수마(水魔)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칠월 장마는 꾸어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칠월에는 으레 장마가 있게 마련이라는 뜻. 따라서 이 속담은 장마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장마가 올 것을 대비하라는 함의로 해석한다. 여름이면 장마가 닥칠 것은 뻔한 일이지 않은가. 어떠한 각오와 준비로 우리의 목숨과 재산과 일상을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만이 최선이라는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을 한 번 더 곱씹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장마는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쓸모가 있다는 뜻을 가진 “오뉴월 장마는 개똥 장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마가 오기 전 가뭄으로 시달리는 우리에게 가뭄 해갈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1984년 홍수 때 “장대비에도 겨우 목숨을 건진 몇몇 해바라기와 잡초”가 “오히려 무성하게 자라 오”를 수 있었다는 기억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지금은 장마의 계절.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