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노년엔 손주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살아야죠. 가끔씩 못해본 여행도 다니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여유롭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어느 모임에서 예비은퇴자 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손주의 재롱은 그저 상상만 해도 경이롭고 달콤하다. 곁에 있는 손주의 사랑스런 눈망울과 귀여운 짓거리, 달콤한 목소리를 떠올리면 노년의 시간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거기다가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는 여유로운 여행까지 즐길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하지만 이미 손자와 함께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요즘 생활이 행복하기는 하지만 여유롭게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 일과는 쌍둥이 손자들과 함께 시작된다. 아침 6시 시계 알람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내는 벌써 어린이집 용품들과 아침밥을 챙기기 시작한다. 7시 전후에 아들과 며느리가 출근하는 길에 손자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놈들이 쉽게 집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몇 바퀴 돌거나, 편의점에 들러 먹거리를 몇 개 사서야 겨우 들어온다. 가끔 옥상의 화단에 올라가서 꽃과 채소를 짓밟기도 한다. 못하게 말리면 다른 쪽으로 빙 돌아서 다시 또 기어 올라간다. 물뿌리개 호스를 내게 겨누고 물을 쏘아대면서 깔깔대기도 한다. 사내놈들이라서 그런지 야생이다. 밥 먹이고, 옷 갈아입혀서 10시까지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아무튼 오전의 육아전쟁은 이렇게 끝난다.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 좀 하고, 점심 먹고 한숨 자고나면 어린이집에서 퇴원하는 4시 가까이 된다. 비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금 떨어진 아들네 아파트로 바로 데리고 간다. 항상 그렇지만 아파트 단지 안의 놀이터와 정원을 몇 군데나 헤집고 다닌다. 그만 놀고 들어가자고 하면 손가락 하나를 빼들고 계속 ‘한번만’을 외쳐댄다. 이렇게 두 시간 정도 놀다 집에 들어가서 밥 먹이고 목욕시킨 후, 아들 부부가 퇴근하면 8시 즈음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듯 손주 육아는 만만치 않다. 우리 부부가 쌍둥이 손주들을 데리고 길을 걸어가면 다들 참 행복해 보인다고 부러워한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그림이고, 사실은 힘들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다. 손주와 함께 지내는 것은 책임과 의무, 그리고 보람으로 하는 것이지 여유를 즐긴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까 싶다. 물론 가끔씩 찾아와 즐겁게 해주는 손주인 경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긴 해도 손자 돌보는 어려움이 학창시절이나 현역시절의 힘든 것에 비길 수야 있을까.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릴 때 놀던 때와 은퇴 후 지금 손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것 같다. 손주들을 돌보기 전에는 내 몸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이 이어진 생명이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몰랐다. 손주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감정인지도 몰랐다. 손주의 웃음과 행동, 그리고 말 한마디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손주는 내 노년의 삶에 소중한 짝이다. 어느 정도 힘들고 성가신 것만 각오한다면 노년의 삶을 구원해주는 것이 손주다. 우리는 은퇴 후 긴 노년의 시간을 그저 여유롭고 편안하게만 보내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편한 것만 찾자면 요즘 MZ세대 사이에 유행하는 ‘반려(伴侶)돌’이나 키우면서 살아야 한다.

반려돌은 Doll(인형)이 아닌 돌멩이 돌이다. 반려동물 키우듯이 돌에 이름을 붙여 애지중지 키운다. 반려돌 설명서에는 이런 사용법이 적혀있단다. ①반려돌에게 당신의 일과를 들려주세요. ②듣고 싶었던 위로, 응원의 말을 반려돌에게 건네주세요. ③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이야기를 반려돌과 나눠보세요. ④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반려돌을 아껴주고 사랑으로 돌봐주세요.

돌은 사람을 속 썩이지도,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별다른 관리도 필요 없이 그냥 감정만 털어놓으면 된다. 어떤가? 노년을 돌멩이와 소통하면서 살아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