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김세곤

전남 순천시에 있는 팔마비(八馬碑)는 청렴의 상징이다. 팔마비는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지낸 최석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선정비(善政碑)다. 『고려사절요』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281년(충렬왕 7년) 최석이 비서랑(祕書郞)으로 발령 났다. 당시 승평부는 수령이 전임(轉任)하면 말을 주는 것이 관례였는데 태수(府使)에게는 8필, 부사(副使)는 7필, 법조(法曹)는 6필의 말을 마음대로 골라 가게 했다.

이윽고 고을 사람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최석에게 고르기를 청했다. 
최석은 “개경까지 가면 되지 말을 골라서 무엇하겠느냐”면서 아무 말이나 골랐다. 개경에 도착한 최석은 말 8필에다가 도중에 낳은 망아지까지 합하여 9마리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승평부 아전이 극구 받지 않자, 최석은 “네가 받지 않는 것은 내가 욕심이 있는 줄을 알고, 내가 겉으로만 사양하는 체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 하면서 말(馬)을 되돌려줬다.

이후 헌마(獻馬) 폐습이 없어졌으며 1308년(충렬왕 34년)에 승평 사람들은 최석의 청렴한 뜻을 칭송해 팔마비를 세웠다. 팔마비는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승평부사 최원우가 고쳐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순천부사 이수광(『지봉유설』의 저자)이 1617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말(馬)에 관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중종 시절 청백리 송흠은 삼마  태수(三馬太守)라 불렸다. 지방 수령이 부임할 때는 전임 고을에서 말(馬)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송흠은 오직 단지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본인, 어머니, 아내가 탈 말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 6조」 ’제3조 제가(齊家)’에 나온다.

이러한 송흠도 관직 생활 초기에는 역마를 개인적으로 썼다 하여 파직 당하기도 했다. 성종 말년에 최부(1454∽1504)와 송흠(1459∽1547)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최부는 응교(정4품), 송흠은 정자(정9품)였는데,  최부는 고향이 나주이고 송흠은 영광(지금의 장성군 삼계면)이어서 가깝게 지냈다. 한 번은 두 사람이 동시에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서로의 거리가 50리였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를 찾아갔다. 점심을 먹다가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어떤 말을 타고 왔는가?’라고 물었다. 송흠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최부는 ‘역마는 서울에서 고향집에 올 때까지만 타는 것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느냐?’고 질책했다.

휴가를 마치고 홍문관에 복귀한 최부는 송흠을 고발했고, 송흠은 파직 당했다. 파직된 날 송흠은 최부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가자, 최부는  “자네는 아직 나이가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이 일화는 동인의 영수 허엽(1517-1580)의 문집 『전언왕행록』에 나온다. 허엽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허성·허봉과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다.

송흠은 이런 공직 초기의 실수를 명심해 평생 청백(淸白)의 길을 걸었다. 송흠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지지(知止)는 ‘멈출 줄 안다’는 뜻인데 노자 『도덕경』 제44장에 나온다.

“ (전략)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나니 그래야 오래 살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이렇듯 송흠은 여산군수·담양부사·장흥부사·보성군수· 전라도 관찰사·병조판서·이조판서·좌참찬 등 높은 벼슬을 하면서 ‘멈출 줄 아는’ 공직생활을 했다. 그는 7번이나 청백리에 뽑혔으며, 아들 송익경도 청백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