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누구나 인생에서 한두 번 실수는 한다.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 하지만 창피하니까 숨기고 산다.

내게는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희망과 열망을 잃어버렸던 청소년기가 있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도시 이주가 한창이었던 1970년 봄,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몇 달 안 된 어느 날에 갑작스레 학교를 자퇴하고 상경을 감행했다. 이유는 서울만 가면 일류대학 나와서 국회의원이나 장관쯤은 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1~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했지만 일류대는 커녕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어둡고 힘든 여러 해가 지나갔다. 바닥을 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살길은 생기는지 어찌어찌해서 20대 초반에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이라는 건물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 상사의 눈치 봐가며 방송대를 다녔고, 밤잠 못자고 석사, 박사까지 하고 나니 50세가 되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큰 사건이었다. 어찌되었던 그 관성으로 70이 다된 이 나이까지 책을 보고 있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까?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어린 자식의 대책 없는 무모한 상경을 말리지 않았을까? 아마 당신들처럼 없어서 배고프고 못 배워 업신여김을 당하는 삶의 고리를 끊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위험을 알면서도 오히려 속으로 지지하고 잘되길 축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누이어 자식이 세상으로 나가는 다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너희들은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으니 나보다 상층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해!”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나는 자식들에게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왜 자식들에게 예전의 내 처지를 대입하려 했던 것일까? 하류인간이고 상류인간이고 관심도 없고, 그냥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얼토당토 않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한의 추위에 난방도 없는 작은 다다미방에서 혼자 이불만 둘둘 말고 잤던 나의 그 시절과 따뜻한 방에서 더운 물을 마음껏 쓰는 환경에서 자라는 자식들의 꿈과 희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칫 부모가 ‘다리’가 아니라 ‘벽’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세대에게는 물질적 성장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 중요한 가치였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다. 나름대로 개성을 가지고 살려하고, 옆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그들에게 우리 세대의 가치관으로 가스라이팅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들의 경험, 가치관,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등은 자칫 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벽이 될 수 있다.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 주고, 인정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부모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꾸 자식의 인생에 개입하려고 한다. 그것이 부모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너무나 고답적이고 전통적인 생각 아닌가? 완전히 엇길로 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자식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할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는 30대 중·후반의 아들과 딸에게 ‘너희들은 왜 꿈이 없어? 대학원도 다니고, 전문지식도 좀 더 쌓지 않고 그렇게 살고 있어?’라고 충고하고 싶어진다. 에이 참!

우리는 자식을 응원하기보다 한심하게 생각하는 때가 많다. 심지어 “네가 뭘 안다고,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윽박지를 때도 있다.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하지만 꼭 자신의 생각대로 사랑하려 한다. 자식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지만 선택하는 결정은 부모가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식을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방법은 ‘다리’가 아니라 ‘벽’이 될 뿐이다.

벽을 허물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 다리는 활짝 열린 마음끼리 만나는 길목이다. 부모의 벽이 높고 튼튼할수록 자식은 부모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부모도 자식도 행복할 수 없다. 마음을 열고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자. 깊은 산중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때에는 흐름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산중의 개울물은 이 골짝 저 골짝을 거쳐 마침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을 지나가게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