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세월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사회적 지위, 건강과 에너지, 찬란한 꿈과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만을 전시하며, 마치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고자 노력하는 노년들이 많다.

그들은 “난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멋있고 행복해!”라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는 즐거운 순간보다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훨씬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우울해지고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어째서 이런 것들은 숨기고 마치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것처럼 행복을 자랑하는 습관이 생긴 걸까?

혹시 멀쩡하게 사는 듯 보여야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때문인가? 사실 은퇴로 인한 사회적 지위의 상실은 노년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실제로 잘 사는 것보다도 남들에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존감 상실은 자연히 숨겨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비교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우월성에 대한 집착은 우리들을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사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약점을 감추고 잘 보이려 애쓰기보다 자신의 삶을 찾아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노년기에는 젊었을 때 가지기 힘든 소중한 것이 있다. 깊어진 지혜, 따뜻한 가슴, 그리고 한가함과 여유. 이런 것들로 남은 인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면 어떨까?

나는 40여년의 풀타임 직장이 끝난 직후 키르키스스탄 트레킹을 갈 기회가 있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텐샨산맥의 알라아르챠 국립공원을 하얀 설산만 바라보고 올라갔다. 해발 3000m 근처, 눈 덮인 설산의 바로 아래 지점에서 신기한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 돌무더기 사이에 예쁜 풀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춥고 메마른 땅에도 이런 아름다운 생명이 살고 있다니. 나도 황량한 사막에 내던져졌지만 이제 이 풀꽃처럼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젊은 날을 바쁘게 살면서 수많은 행복의 순간들, 따뜻한 정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많은 시간들을 던져버렸다. 이제라도 하나하나 챙기며 살아가자. 건강함에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어서 좋은 그런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자. 한가롭고 여유로운 날을 살면서 단지 주위 사람들 눈 때문에 자신의 행복지수가 낮아지면 안 된다. 자신을 과시하는 자랑 따위는 필요 없다.

삶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의 과정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나, 모든 것이 한때 일뿐. 우리는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나이 들었다고 예외는 아니다. 늙는다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늙어가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스스로 행복하게 될 수도 있고 불행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자. 나이 들수록 행복을 실어오는 바람은 약해지니 힘껏 달리면서 스스로 행복의 바람개비를 돌려야 한다.

인생 후반기에는 단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게 좋을 듯하다. 우리는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 위축됨을 느낀다. 그렇다고 정리만 하고 살기에는 은퇴 후 인생이 너무 길다. 새롭게 마음 쏟을 일도 마련해야 한다. 과연 후반기 인생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 자기 성찰과 변화가 필요하다. 박쥐는 평소에는 똑바로 날아다니다가 동굴에서 휴식을 취할 때는 거꾸로 매달려 있다. 가끔 거꾸로 매달려 바라볼 때 변화의 참다운 모습이 보인다. 인생은 거듭거듭 새로워져야 한다.

자, 이제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후반기 인생을 인도할 것이다. 주위의 홀대를 무시하고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