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노년이 먼 곳에 있는 것 같아도 지척에 있다. 우리는 언제 노년이 되는가? ‘뛴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걷고 있다. 무엇을 하려고 하면 주위에서 걱정을 먼저 한다. 무엇이든 곧잘 잊어버리고 가끔 하느님과도 다툰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인가 여긴다.’ 그렇다면 늙음이 찾아온 게 분명하다.

밀림의 왕인 사자도 권좌에서 물러날 때가 있고, 무림의 고수도 칼을 꺾을 때가 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고 자연의 이치다. 나이 듦과 은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아직 심장, 혈관, 근육, 뇌와 마음이 멀쩡한데도 은퇴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사회적 은퇴는 빨라지고 있다. 길어진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가끔 손자를 등에 업고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두 돌이 지나서 걸을 수 있지만, 쌍둥이 중에 한 놈이 할머니에게 업히면 자기도 업어 달래서다. 어색한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어이구 저런, 왜 업고 갈까?”라고 한다. 나의 반응은 “뭐 어때서~”다. 집안의 대를 이어갈 손자를 할아버지가 업고 가는데 뭐가 문제인가?

무엇이든 의미 있는 일을 한다면 쓸모 있는 삶을 사는 것 아닐까? 왕년에 이름깨나 알린 공공기관의 CEO는 현역 때의 보람일 뿐이고, 은퇴한 지금은 손자를 돌보는 것이 최고로 보람 있는 일이다. 이렇듯 평범한 삶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 노년의 삶이다. 행복해 지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현재의 삶이 의미 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굉장히 낮은 의식수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좋은 생각을 할수록 의식지수가 높다고 하니 수치심, 슬픔 보다는 자존감, 용기, 기쁨을 생각하자. 나쁜 일이 아니라면 세상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매순간 진심을 다한다면 우리 인생에 헛된 시간은 없다. 자유롭고 평온한 삶의 출발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 생각과 느낌을 덧칠할 필요가 없다.

노년에는 거북이처럼 뚜벅뚜벅 인생길을 걸어가는 게 좋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하나 둘 하나 둘, 똑같은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 남이야 더 빨리 달리든 말든 이 속도가 내 능력이 딱 맞다싶으면 그대로 유지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냉정하게 구분한다. 더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참아야 한다. 무리하다 인생을 힘들게 사는 것보다 나만의 경주를 완성하는 쪽이 낫다.

옆의 사람이 어떻게 달리든 내 페이스만 잘 지키면 된다. 토끼처럼 시선이 상대에게 꽂혀 자만해서는 안 된다. 저만치 앞서가는 상대를 보며 기죽을 필요도 없고, 헐떡거리는 상대를 보며 자만할 이유도 없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혼자서 꿋꿋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핵심이다. 노년은 정속주행이다.

이제 끊임없이 치고 올라갈 필요도 없다. 간간히 내리막도 경험하면서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사명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한가함을 받아들이는 일에도 소홀하지 말자. 세상에 한가함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한가(閑暇)’라고 해서 그저 아무 일 없이 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가함은 글을 읽게 하고, 여행을 떠나게 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하며,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게 한다.

‘특종 세상’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예전에 각광 받았던 인기 연예인이나 스포츠맨들이 노년을 어렵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날의 명예에 취해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삶을 망친 경우가 많다. 삶은 변화다. 한창 때의 우리는 나이 든 후의 우리가 아니다. 상황이 나쁘게 바뀌었더라도 그 속에서 적응하고 성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래봬도 무술경력만 30년인데…”
무술경력 30년에 다시 마당을 쓸면 잘못된 것인가? 그저 기분 좋은 설렘을 따라서 살면 그것이 곧 쓸모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