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강사.

1809년과 1810년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쳤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시신(屍身)들이 언덕을 메웠다.    

이러함에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수탈만 일삼았다. 다산 정약용은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탐학만 일삼는 썪은 아전을 고발하는 <용산리(龍山吏)>·<파지리(波池吏)>·<해남리(海南吏)>,소위 3리(三吏) 시를 지었다. <용산리>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석호리(石壕吏)>, <파지리>는 두보의 <신안리(新安吏)>, <해남리>는 두보의 <동관리(潼關吏)> 시를 차운하였다.

다산이 시성(詩聖) 두보의 시를 차운한 것은 두보의 시에는 백성들의 아픔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두보는 당나라 현종 때 일어난 안사의 난으로 백성들이 겪은 고통을 시로 지었다. 즉 3리 3별시(신안리, 동관리,석호리와 신혼별 新婚别, 수노별 垂老別, 무가별 無家別)는 사회시(社會詩)의 극치였다.

그러면 다산의 3리(三吏) 시를 살펴보자. 먼저 1810년 6월에 지은 <용산리>이다. 이 시는 강진 용산촌에 들이닥친 아전의 횡포를 고발한 시이다. 

아전들이 용산촌에 들이닥쳐서       吏打龍山村
소 뒤져 관리에게 넘겨주는데        搜牛付官人
그 소 몰고 멀리멀리 사라지는 걸    驅牛遠遠去
집집마다 문에 기대어 보고만 있네.  家家倚門看

사또님 노여움만 막으려 하니        勉塞官長怒
그 누가 백성 고통 알아줄 건가.     誰知細民苦
유월에 쌀 찾아 바치라 하니                      六月索稻米
모질고 고달프기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보다 더하네.  毒痡甚征戍

좋은 소식은 끝내 오지 않고          德音竟不至
만 목숨 서로 포개고 죽을 판이네     萬命相枕死
제일 불쌍한 건 가난한 백성이라      窮生儘可哀
죽는 자가 오히려 팔자 편하네        死者寧哿矣

남편 없는 과부와                   婦寡無良人
손자 없는 늙은이들                 翁老無兒孫
빼앗긴 소 바라보며 엉엉 우는데     泫然望牛泣
눈물 떨어져 베적삼을 다 적시네     淚落沾衣裙

촌마을 모양새가 이렇게 피폐한데    村色劇疲衰
아전 놈 왜 가지 않고 앉아있을까    吏坐胡不歸
쌀독은 바닥난 지 이미 오랜데       甁甖久已罄
무슨 수로 저녁밥 짓는단 말인가.    何能有夕炊

(아전이) 죽치고 앉아 남 못살게 구니  坐令生理絶
온 동네 사람들 목메어우네.          四隣同嗚咽
소 잡아 포를 떠서 세도가에 바치면   脯牛歸朱門
재주꾼 솜씨가 이로써 드러나네.      才諝以甄別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다산시문집 제5권/시 詩) 

흉년에 먹을 것도 없는 마을에 들이닥쳐 세금 안 낸다고 소마저 가져가는 아전. 죽치고 앉아 밥 얻어먹고 가려는 아전. 이런 승냥이의 횡포에 분노가 치민다.

다산은 『목민심서』「이전(吏典)」 ‘아전을 다스림(束吏)’에서  아전의 착취를 이렇게 적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징수하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서 당연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런데 아전 중에서도 전라도 아전의 착취는 가장 심했다. 오죽했으면 매천 황현(1855∼1910)이 『매천야록』에서 ‘전라도 아전은 조선 3대 폐단’ 중 하나라고 적었을까.
 
“운현(흥선대원군)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 평안도 기생과 전라도 아전이 그것이다’.
(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매천야록, 서해문집, 2006, p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