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1980년대 전경련 국제부에는 아일랜드에서 온 벽안의 청년이 근무했었다. 명문대 출신이었지만 본국에는 일자리가 없어 돌고 돌아 한국까지 와 일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아일랜드를 찾은 전경련 사절단에 아일랜드 개발청(IDA)의 고위관리가 요청해서 온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에 출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수도 더블린마저 도로는 포장이 반쯤밖에 되어 있지 않았고 기업이라고는 흑맥주를 만드는 기네스만 꼽힐 정도로 경제가 낙후되어 있었다.

유럽의 병든 노파로 불리던 아일랜드가 겔틱의 호랑이(Geltic Tiger)로 화려하게 떠 올랐다. IMF에 의하면 아일랜드의 올해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구매력 평가 기준(PPP)으로 14만5000 달러에 이르러 룩셈부르크(14만3000 달러)를 넘어 세계 1위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종주국 영국(5만7000 달러)에 비해서는 두 배가 넘는다.

아일랜드의 화려한 비상에는 정치개혁이 무엇보다 큰 몫을 했다. 끝없는 침체로 경제에 활로가 보이지 않던 1987년 제1야당 게일당의 앨런 듀크스 대표는 집권 포일당 찰스 로이 총리의 개혁에 협조키로 했다. 조건은 단 하나, 정책이 길에서 이탈하거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해 10월 노조까지 포함해 '사회연대협약'이 맺어졌다. "일자리가 먼저, 임금은 그다음"이라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후 20%를 넘던 임금상승률은 2.5%로 안정됐고 매년 200건을 오르내리던 노사분규는 1988년 이후 연 50건 아래로 떨어졌다. 기업의 80%에 노조가 없는 나라가 됐다. 그러면서 실업률은 1980년 20%에서 2007년에는 4%로 급락했고 소득은 급증했다.

경제적 성공에도 구조조정에는 결연했다. 그래서 경제의 군살이 빠지고 효율이 높아졌다. 2010년 IMF에서 85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도 공무원 10% 감축, 사회보장지출 8% 축소 등 재정 건전화 조치를 단행했다.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안착되면서 법인세를 낮춰도(12.5%) 법인세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다국적 기업들 중심으로 외국기업의 투자가 줄을 잇기 때문이다.

미국은 2021년부터 글로벌 최저한세 도입을 추진해 각국의 법인세율을 15% 이상으로 맞추려 했다. 그러자 다국적 기업들은 유럽 평균보다 9%포인트나 세율이 낮은 아일랜드에 법인세를 납부하기 시작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을 유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려 유럽 본부를 아일랜드로 옮기기도 했다.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도 행운이었다. 많은 기업이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로 왔다. 영국을 떠난 금융회사의 30%가 더블린으로 주요 시설을 옮겼다고 한다. 영어 상용, 감독 체계의 유사성이 큰 이유가 됐다.

세계 20대 의약품 제조사 중 19개가 아일랜드에 R&D 센터 및 생산기지를 구축했다. 지식재산권(IP) 관련 수익에는 세금을 최대 50%까지 감면해 주는 '지식개발박스'와 R&D비용 추가세액 공제가 큰 매력이었다. R&D비중이 큰 빅테크 기업들, 구글, 애플, 인텔, 메타 등도 유럽본부를 아일랜드에 세웠다. 아일랜드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은 1,700여 곳에 달하고 이들이 수출과 고용을 견인하며 2022년만도 경제성장률을 12.2%로 끌어 올렸다. 이는 유로존 국가들의 평균 3.5%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아일랜드의 매력은 투자유치제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법인세율은 헝가리가 9%로 더 낮다. 결국 아일랜드의 사회 시스템이 주는 매력이 경제적 유인보다 훨씬 크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사회가 깨끗하고 국민들은 착하다. 부패지수는 세계 10위, 한국은 63위다. 평화지수는 3위, 한국은 43위다. 국가 간 이웃을 돕는 이타주의 지수(선한 국가지수)는 2022년 8위, 반면 한국은 37위 였다. 세계기부지수는 아일랜드가 10위인 반면 한국은 88위로 뒤처져 있다.

최근 화제작 '너무 작아서 실패할 수 없는 국가'란 책을 낸 스위스계 미국인 제임스 브라이딩은 인구도 땅도 작고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는 국가들의 앞날이 큰 국가보다 밝다고 했다. 그는 작은 나라는 항상 외부의 위협과 충격에 민감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혁신한다고 했다. 인적 구성이 균질하기 때문에 사회통합에도 유리하다고 하면서 아일랜드를 모델 국가로 꼽았다.

당시 더블린 출장길에서 필자는 아일랜드에서 온 전경련 직원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아드님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얘기드렸더니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세상의 어머니가 모두 착하지만 아일랜드의 어머니는 더 착한 것 같았다. 경제적 풍요는 결국 깨끗하고 착한 사회로 완성된다는 것을 요즘에 더 느끼게 된다. 어려움에 처한 한국경제와 세계 최고의 부국(富國)이 된 아일랜드를 비교하며 새삼 얻게 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