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는 청백리 박수량(1491∽1554) 묘소가 있다. 묘 앞에는 글자 한 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있다.

“그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碑)에다 새삼스럽게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累)가 될지도 모른다.”

명종 임금은 청백리 박수량의 삶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백비를 하사했다. 

먼저 1554년 1월 19일자 『명종실록』에 실린 박수량의 졸기를 읽어보자. 

“지중추부사 박수량이 죽었는데, 전교하였다.
 ‘염근(廉謹)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 특별히 치부(致賻)하라.’ 

박수량은 호남 사람이다. 초야에서 나와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여러 번 지방에 보직을 청하였다. 일 처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그의 아들이 일찍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그는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聖恩)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집도 10여 간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중종께서 특가(特加)로써 포장하여 지위가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저축이 조금도 없어서 처첩들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으므로 대신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그는 청백의 절개를 분명히 세웠으니 세상에 모범이 될 만했다.” 

박수량은 1546년과 1551년 두 번에 걸쳐 청백리에 뽑혔다. 하지만 그도 한때 의심을 받았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박수량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박수량이 국유재산을 사유화했다고 모략하였다. 이에 명종은 비밀리에 암행어사에게 진상조사를 시켰다. 과객으로 변장한 암행어사는 장성 본가를 살핀 후 청빈하다고 보고했다. 미심쩍어 명종은 재조사를 시켰다. 두 번째 암행어사 역시 박수량의 청렴을 보고하였다. 비로소 명종은 박수량을 신임하고 중책을 맡겼다 한다.

박수량 묘소. 사진=김세곤 제공
박수량 묘소. 사진=김세곤 제공

한편 박수량은 부패척결에 앞장 선 검찰관이었다. 그는 1530년 사간원 사간 시절에 인사 청탁에 연루된 좌찬성 이항을 파직시켰다. 이후 이항은 함경도로 유배 가서 사약을 받았다.

1552년 2월 박수량이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그는 영의정 이기의 오른팔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하라고 보고했다. 임구령은 1545년 을사사화의 주역 임백령의 동생이다. 

명종은 영의정 이기가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이기가 거느린 양인(良人)이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는지를 팔도의 관찰사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7도의 관찰사는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은 이기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조사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박수량만은 이기가 거느린 양인 조사를 방해한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키라고 보고하여 임구령이 파직되었다. (명종실록 1552년 2월 29일)

아울러 박수량은 애민(愛民)하는 목민관이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근무한 지 두 달 되었는데 날씨가 가을인데도 우박과 눈이 내려 겨울 같았다. 백성들이 병에 걸리고 특히 임산부들이 위험 함을 있음을 직시하고 조정에 약제(藥劑)를 요청하였다. (명종실록 1551년 10월 24일)

한편 박수량은 후손에게 이렇게 유언하였다.

“나는 초야에서 태어나 임금의 후한 은총으로 판서 벼슬에까지 올랐으니 그 영화(榮華)는 과분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 행동을 삼가하여 시호도 주청하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

박수량은 별세한 지 250년 후인 1805년(순조 5년) 1월에야 시호를 받았다.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인데, 청백수절(淸白守節)의 정(貞)과 애민호여(愛民好與)의 혜(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