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목민관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은 거창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실천 하나가 백성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런 선비가 청백리 기건(奇虔?~1460)이다. 호는 청파(靑坡)인데 집이 청파(靑坡 서울시 청파동)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다. 그는 걸어서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에 다니면서 ‘대학, 중용’ 등을 외우곤 했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됐다.

일찍이 황해도 연안(延安)군수가 됐는데, 군민(郡民)들이 군수에게 붕어를 바치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기건은 3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해 돌아갈 때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야 우리 백성을 위해 술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고 했다.

1443년(세종 3년)에 기건은 제주목사로 발령 났다. 기건은 백성들이 
전복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자,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세조실록 1460년 12월 29일, 기건의 졸기).

성현은 『용재총화』에 이렇게 기록했다.

“기건이 평생 전복을 먹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일찍이 제주목사가 됐을 때 백성들이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전복 따기에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봤으므로 먹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한편 제주도는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들이 나질(癩疾: 한센병)이 많았는데, 비록 부모와 처자일지라도 전염될 것을 두려워해 나질 환자를 사람 없는 땅으로 옮겨 절로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번은 기건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바위 밑에서 신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살펴보니 나병 환자가 있었다.

그 연유를 알고 난 기건은 곧 구질막(救疾幕, 병을 치료하기 위한 막사)을 꾸미고, 나병을 앓는 자 1백여 명을 모아 두되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했다. 이어서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을 시켜서 거의 다 낫게 했다. 기건이 체임돼 제주도에서 돌아올 때에 병이 나은 자들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문종실록 1451년 4월 2일).

(2016년 5월 17일에 개관한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 박물관에는 1451년 4월 2일의 ‘문종실록’이 전시돼 있다.)

또한 제주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산골짜기에 버리는 것이 풍속이었는데 기건이 장례 치르는 법을 가르쳤다. 하루는 꿈에 3백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타나 뜰 아래서 머리를 조아리며 “공의 은혜로 우리의 해골이 맨땅에 나뒹구는 것을 면하게 됐습니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공께서는 응당 금년에 어진 후손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때까지 기건의 세 아들이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손자를 보게 됐다. 『대동기문』에 나오는 일화이다.

이후 기건은 전라도 관찰사 겸 전주부윤, 개성부 유수 등을 했다. 한편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기건은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했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지켰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는 그의 신위가 사육신, 생육신 등과 함께 모셔져 있다.

기건의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이다. 청렴하고 결백해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 되게 해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기건의 후손들은 거유(巨儒)와 의병장들이 많다. 거유는 퇴계 이황(1501∽1570)과 사단칠정논변을 한 고봉 기대승(1527∽1572)과 조선 후기  성리학자 노사 기정진(1798∽1879)이고, 의병장은 한말의 기우만·기삼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