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민주정치의 본향인 고대 아테네는 그리스 폴리스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나라였다. 그런데 전성기에조차 인구는 30만 명 내외에 그쳤다. 시민 모두가 참정권을 가졌지만 주민 모두가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로서 18세가 되면 시민 명부에 올랐다. 2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20세가 되었을 때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여성, 미성년자, 노예, 거류외국인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전체 인구 가운데 시민의 비율은 대략 8분의 1쯤이었다고 한다. 시민의 수가 3만 명이었다면 전체인구는 25만 명 안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4만 명에 까지 이른 때가 있었다고 해도 인구는 30만 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쨌든 20세 이상 남성이면 모두가 최고의결기관인 민회(民會: 에클레시아)에 참석해서 의결권을 행사했다.

스웨덴, 의원 2명에 보좌관 1명

그런데 회의 출석을 썩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시민들은 저잣거리에서 끼리끼리 떠들어 말하기를 좋아했지, 프닉스(노천 의사당)에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수고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관리들이 붉은 색으로 물들인 동아줄로 시민들을 엮어 데리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래봐야 참석자 수는 5000~6000명 정도였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프닉스를 30~40% 정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에는 출석 일당을 지급하며 회의 출석을 독려했다.

당시엔 참정권이 권리이기도 했지만 의무이기도 했다. 이 참정권의 의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국민 혹은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은 사라지고 특권의식만 남아 있는 것 같아 개탄스럽다. 2500~2600년에 이르는 서구 민주정의 전통과는 달리 기껏 70여년 경험해봤을 뿐인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이런 경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국회의원 직이 벼슬이라는 인식만 있을 뿐 민주 국민의 신성한 책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장기표 상임대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떠올린 아테네 민주정의 모습니다.

“스웨덴 국회의원들을 보라. 근로자 평균월급을 받고 개인 보좌진도 없다. 국회의원 2명이 보좌관 한 명을 공유하고 전용차량 없이 대중교통을 타고 다닌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한 번 하고 나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4년간 봉사했다’며 다음에는 안 하려 한다. 특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뉴데일리, 9.12).

장 대표는 인터뷰에서 특히 스웨덴 의원들의 예를 들었다. 봉사와 헌신이라는 점에서 정말 모범적인 사례라 할만하다. 그래서 스웨덴 의원들의 이야기는 의정 개혁의 과제가 대두될 때마다 소개되고 상찬된다. 언론들이 앞장서서 이를 보도하고 일부 의원들이 공감을 표하곤 하는데 금방 잊어버리는 게 문제다.

민주정치가 특권계급 만들다니

우리나라 의원에 대한 대우와는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의원 두 명이 보좌관 한 명의 도움을 받는 스웨덴 의원들과는 달리 우리 국회의원들은 한 명이 아홉 명의 보좌를 받는다. 예사 보좌진이 아니다. 국가공무원 신분을 갖는 4급 2명, 5급 2명, 6,7.8.9급 각1명에 인턴 1명이다. 의원 보좌관 제도가 많이 다른 미국을 예외로 하면 세계에서도 유별나다. 이렇게 많은 고급인력의 보좌를 받는데 의원이 왜 몸소 일을 하려하겠는가.

세비 및 각종 수당‧보조금‧지원금 규모도 엄청나다. 장 대표가 대충 소개하긴 했지만 워낙 다양한 명칭으로 지급되고 있어 일일이 계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의원에 대한 보수가 미국, 일본, 독일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게 무엇에 대한 보수인지 국민들은 다 잘 알고 있다. 주로 야당의원들의 행태가 그렇지만 대정부 질문 때 국무위원에게 호통치고 훈계하는 수고비가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악의에 찬 피킷을 들고 장외에서 시위를 벌이는 대가도 만만찮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들은 의회 안에서는 어떤 말에 대해서든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정말이지 신나는 직업이라고 하겠다.

장 대표의 지적에 따르면 국회의원들이 누리는 특권 및 특혜가 180여 가지에 이른다. 민주정치가 가장 비민주적인 특권계급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 같은 특권의 폐지에 동의 의사를 밝힌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최승재 조경태 최재형 강대식 이종배 권은희 의원, 더불어민주당 출신 무소속 양향자 의원 등 7명이었다고 한다. 나머지 대다수 의원들은 외면한 셈이다.

운동본부가 지난 7월 17일 국민총궐기대회를 앞두고 김진표 국회의장,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고 공문을 보냈는데 답변은 없었다. 궐기대회가 끝나고 의장실, 당 대표실로 가려했지만 경찰이 저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들이 특권폐지운동을 (사실상) 반대하는 까닭은 뻔하다.

“그것 누리자고 죽을 둥 살 둥 뛰고 또 뛰어서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누구 좋으라고 내놔!”

민주화 보상금 신청 안한 까닭은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스웨덴 의원들이 특권 없어서 한 번만 하고 말겠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테네 시민들처럼 벼슬을 시답잖게 여길 수도 있다. 반면 한국의 의원들 가운데 특권을 싹 다 빼앗기고도 그 자리에 남아 있겠다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그 정도로 이 사람들은 특권‧특혜의 재미와 이익에 탐닉하고 있다. 그냥 즐기기만 하고 말면 그나마 낫겠는데 너무 기괴한 행태를 정치인의 특권이나 되는 양 거듭하고 있으니 개탄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민주당 이 대표, 지난달 31일 갑자기 무기한 단식선언을 했다. 오늘까지 15일간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있지만 핵심은 ‘사법리스크에 대한 저항’이다. 오해인가? 민주당 지도부 인사들이 국민의힘 ‘횟집 먹방’을 성토하는 와중에 그는 목포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규탄’ 집회를 이끈 후 활어횟집에서 ‘참 맛있게’ 식사를 했다. 단식 전날이었다. 언행 불일치를 비판하는 국민의힘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는 ‘한심하고 나쁜 정당’이라고 매도했다. 이런 내로남불 행태도 특권‧특혜 중독증의 하나일 것이다.)

장 대표는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다. 오랜 수배 및 수감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받으면 안 될 돈이기 때문에 안 받았다. 받아도 되는데 안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돈을 몇 푼 받고 나서 민주화운동 세력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우리가 강제로 끌려가서 민주화운동을 했나. 대학생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지식인의 책무였다.…매번 대학생 시절 투쟁 역사를 들먹이며 국가에 자꾸 ‘돈 내놓으라’고 하니 국민들에게 ‘당신들 이제 민주화운동 보상 다 받았지 않으냐’는 취급을 받는 것이다”(뉴데일리, 위의 기사).

장 대표의 말이다. 민주당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 말을 듣고서도 특권과 특혜에 취해 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