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추억이란 무엇일까. 기억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리움이란 무엇일까. 이들은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있는 소중한 재료다. 추억과 기억과 그리움이 서로 따뜻하게 맞물려 호흡하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는 느낌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 우정도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숨 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41년 만에 친구를 기다린다. 고교 동창생을 기다린다.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기대와 설렘도 동행해 있다.  

 다행히도 나는 그를 단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내 이야기보따리가 꽃을 피웠다. 역시 41년이라는 공백을 허물어뜨린 데는 추억과 기억이 중심 역할을 했다. 그리움은 싱그러운 노래처럼 살아 움직였다. 이 순간만은 그리움은 추억과 기억이 낳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즐거운 함성이다. 고교 때의 그 모습처럼 우리는 가을 들판에 핀 코스모스처럼 소담하게 웃었다. 대화를 이어갔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안부보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과 기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등록금을 내지 못해 고교를 자퇴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나는 불청객으로 찾아온 폐결핵까지 앓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그런 슬픔을 위로받고자 찾아간 친구. 친구와 그의 어머니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하며, 어머니의 안부를 묻자, 아, 몇 년째 아프시다고 한다. 야속한 세월 앞에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을 느끼게 한다. 덧없음이 강물처럼 내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41년 만의 만남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만이 간직한 기억과 추억이 있기 마련. 당시 내가 쓰는 한글 필체가 마음에 들어서 따라 써보고 싶었다는 친구는 지금도 그 필체를 기억하고 쓸 수 있다며, 고교생처럼 내 앞에서 글씨를 써 보인다. 그리고 내 글자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래, 친구야, 내가 너에게 그런 존재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울 뿐이다. 더불어, 고교 시절에 내가 ‘국민교육헌장’ 전문(全文)을 한자로 써내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는 기억을 들을 때, 아, 그것은 분명 내게는 잊힌 것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내가 갖고 온 나의 시집과 번역서에 친구의 이름을 한자로 써서 건네주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고마워한다. 

 한편으로 너무 미안한 일은 친구도 고등학교 때 아팠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었다. 왜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나를 채찍질해 본다. 그리고 그가 대학 시절 겪었던 어려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나를 되돌아본다.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 친구야, 짧지 않은 직장생활과 지난했던 삶에도 선한 인상과 적당한 흰머리와 주름, 그리고 아픈 데 없다는 건강은 자네가 가져온 최고의 선물이었다.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데는 분명한 과정이 하나 있는데, 매번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는 영국의 작가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 1892-1983)의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래, 이제 친구는 그런 존재다. 그렇게 살아가자. 나이 한두 살씩 먹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추억과 기억 속에서 그리움을 낳고 살아야 한다. 이 계절처럼 같이 익어가자. 만나서 즐거웠다. 또 만나자. 가을 들판에 핀 코스모스 같은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