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강사.    

1608년 2월 1일에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뜨면서 “큰일을 맡길 만한 인물은 이원익뿐이다.”고 유언한 것이다. 이원익은 여섯 번이나 사직 의사를 밝혔으나 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8년 5월 7일에 이원익은 광해군에게 대동법(大同法)실시를 건의하였다. 방납의 폐해를 막고자 함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은  여러 가지 폐단이 많았다. 지방에서 납부할 공물을 중간에서 관리들이 대신 납부하고 농민에게 대가를 받는 방납이 성행하였다. 방납업자들은 농민들에게 높은 대가를 요구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난 반면 국가의 
수입은 감소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류성룡은 공납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수미법(收米法)을 시행한 바 있어 이원익은 공물을 호(戶) 단위로 징수하던 것을 대동미, 곧 1결당 쌀 두수로 환산하여 걷는 대동법을 건의하였다.    
 
광해군은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대동법을 경기도에 한시적으로 시범 실시하도록 윤허하였다. (광해군 일기 1608년 5월 7일) 1)

한편 광해군 시대는 정권 초기부터 피바람이 불었다. 1609년에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1613년에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이어서 1614년에는 기어코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패륜을 일삼았다. 

1615년 초에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죄상을 알렸다. 특히 저주의 일과 흉측한 글을 돌린 사실을 강조하고 이 일에 연루된 나인들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하였다. 

1615년 2월에 이원익은 글을 올려 반대하고 나섰다. 이원익은 “어머니가 비록 자애롭지 못하여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상소하였다. 

어머니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 (倫紀)가 지극히 무겁기 때문입니다.  성스럽고 밝으신 전하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주와 흉측한 글은 역적들의 사주에서 나온 것이고 궁녀들이 한 짓이지 대비가 직접 관여한 것이 아닙니다. (광해군일기 1615년 2월5일자)  

광해군은 노하였다. 한편으로는 평소에 대접을 후하게 한 완평부원군 이원익에게 서운하였다. 대간들이 ‘임금을 협박하고 역적을 두둔했다’고 이원익을 탄핵하자 광해군은 6월에 이원익을 강원도 홍천으로 귀양 보냈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백사 이항복은 이원익이 홍천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이와 같은 일은 생각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 누가 북두 자루를 훔쳐가지고 
혼자서 천기를 운용할 수 있는고 

왜 어찌할 수 없는 삶을 괴로이 살랴 
차라리 죽어서 모르는 게 나으리라.
높은 하늘의 태양을 우러러보면 
본디 스스로 맑은 빛이 있다오 

주1) 그런데 대동법 실시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심하여 더 이상 확대는  어려웠다. 다행히 1623년(인조 1)에는 강원도에서 실시되었고,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되었으며, 1708년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 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 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대동법은 김육(1580-1658)이 주창하였다고 생각하나, 대동법을 주창하고 경기도에 시범 실시한 것은 이원익이 먼저이고, 대동법을 충청 · 전라도 까지 확대 시행에 공이 큰 사람이 김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