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칼럼니스트.
최재식 칼럼니스트(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젊은 사람들과 1대 1로 표결해야 하나?”
얼마 전에 자신의 아들이 중학생 때 한 이 말이 되게 합리적이라고 대중 앞에서 얘기했다가 혼쭐이 난 사람이 있다. 바로 제1야당의 정치혁신을 맡은 위원장이다.

쉽게 말해 선거에서 젊은이는 2표, 늙은이는 1표를 행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거다. 결국 살날이 많지 않은 노년들은 목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 아닌가? 노인들의 들끓는 분노에 그 말을 뱉은 당사자가 대한노인회를 찾아 사과했지만, 노인회의 회장은 “손찌검하면 안 되니까 사진이라도 뺨을 한 대 때리겠다.”며 위원장의 사진을 손으로 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다.

노인회장의 행동이 지나쳤다면서 “그래, 맞아. 앞으로의 세상은 젊은 너희들 것이니 알아서들 하렴, 지지든 볶든. 우린 마음 비웠어.”라고 태연한 듯 말하는 노년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인생 70이면 가히 무심(無心)이로다.
흐르는 물은 내 세월 같고,
부는 바람은 내 마음 같고,
저무는 해는 내 모습 같으니.

하지만 강한 긍정은 부정의 마음을 품고 있는 법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 마지막 연에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는 눈물을 많이 흘리겠다는 반어법 아닌가. 나이 들었다고 모든 것에 초연해질 거라는 생각은 아직 늙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편견일 뿐이다. 생의 외침은 노년이라고 결코 그치는 일이 없다.

노년이라고 왜 꿈을 버렸겠는가?
정말 하고 싶었지만 현실에 쫓겨 해보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노년이라고 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슴속에는 아직도 타다 남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노년이라고 왜 아픔과 외로움만 있겠는가?
기쁨과 충만함은 젊었을 때보다 못하지 않는데.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는 ‘인생 칠십을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70세를 고희(古稀)라고 하지만, 사실은 천 년도 훨씬 지난 시절에 나온 말 아닌가. 당시의 평균수명은 30세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80세를 훌쩍 넘었다. 지금은 ‘인생 100세 고래희’다. 이제 70세를 노인이라 부르면 화낸다. 인생 70, 이제야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오래 살게 되니 고령화를 걱정한다.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간다고 야단이다. 실업이나 세금폭탄 등 사회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자기들 몫의 인생이 끝났음에도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노인들 탓이라고 거품을 문다. 하지만 그렇게 호들갑 떨거나 화낼 일이 아니다.

인구 고령화 요인은 두 가지다. 장수와 저 출생. 이중에서 적어도 장수로 인한 고령화는 사실을 잘못 인식하고 대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분이 크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과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늘어나지만, 건강하니 오래 사는 것 아닌가. 멀쩡한 사람을 노인 취급해서 뒤로 물러나게 해놓고 고령화 걱정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우리 앞에 직면한 고령화 문제의 상당부분은 ‘변화와 적응’의 시차 때문에 발생한다. 수명은 빠르게 늘어나는데 개인의식과 사회제도는 더디게 따라가고 있다.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다. 노년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빨리 바꿔서 액티브 시니어들이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잉여인간’ 취급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말로 인구의 고령화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저 출생이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잘 낳지 않으니 사회가 고령화되는 것 아닌가. 도대체 무슨 돌개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2022년 현재 합계출산율 0.78 … 와우, 세계 1위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에서 19~34세 청년들 중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비율은 36.4%, 결혼하더라도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응답은 53.5%다. 어떤가, 문제는 노년이 아니라 바로 젊은 당신들 아닌가?

이쯤 해두자. 젊은이와 늙은이를 갈래짓기 할 의도는 없으니까. 삶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 긴 연속이다. 인생 한살이 어느 시기도 소중하지 않는 때가 없다. 젊음은 젊음대로, 늙음은 늙음대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