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강사

1618년 1월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모하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에서 한갓 ‘후궁’으로 강등하였다. 

5월에 폐모 반대로 북청으로 유배 간 이항복이  세상을 떠났다. 강원도 홍천에 유배 중인 이원익은 이항복의 별세 소식을 듣고, “영창대군이 죽을 때는 간언을 안 하더니, 대비를 폐모하려 할 때는 극력 간언하다가 삭막한 북녘 땅에서 죽었구나. 참으로 훌륭하다.”라고 말했다. 
 
1619년에 이원익은 5년간의 유배가 풀렸다. 이후 그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여강 근처에서 4년간 은둔하였다.   
                
1623년 3월13일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김유 · 이귀등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냈다. 16일에 반정공신들은 77세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하였다. 19일에는 이이첨 · 정조 · 윤인 등 광해군 정권의 핵심들을 처형했다.

광해군에게 원한이 사무쳤던 인목대비는 “그 인간을 반드시 죽여야만 분이 풀리겠다.”면서 극형을 주장하였다. 이원익은 인조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광해군이 천명을 어겼으니 폐위는 당연하지만, 그를  죽이는 것은 저도 한 때 그의 신하였으니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죽여야 한다면 저는 물러났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이원익의 말을 따랐다. 광해군은 참형을 면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이랬으니 이원익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소문이 났다. 청탁이 어찌 없었으랴. 하루는 이원익이 측실 집으로 퇴근했는데, 진주 구슬로 장식된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띄었다. 그 사유를 측실에게 캐 보니, 광해군 때 권력을 휘두르다가 죽게 된 사람의 애첩이 제 남편을 살려달라며 측실에게 뇌물로 진주 신발을 보냈던 것이다.

이원익은 한탄하였다. “신하에게 이런 물건을 가지게 하였으니 그 임금이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애첩에게 이런 물건을 신게 하였으니 그 사람이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는 단호하게 처벌하였다.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원익은 체찰사로서 공주까지 피난하면서 인조 임금을 모셨다. 1627년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까지 남하하였다. 

1627년 가을에 이원익은 사직을 청하였다. 인조는 흰 이불과 흰 요를 주어 검소한 덕을 표하며 말하길, “평생의 검소함은 경의를 표할만하다.”하고 승지를 딸려 보냈다.

인조가 돌아온 승지에게 그의 거처에 대해 묻자,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 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고 복명하였다.
 
인조는 “정승이 된 지 40년인데 초가 몇 칸뿐이냐.”하고 경기도 감사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경기도 백성들의 노고가 심하니 병든 신하를 위하여 집을 짓게 할 수는 없다고 극구 사양하였다.
 
인조는 답하였다. “경을 위해 집을 짓는다고 말하면 경기 백성들이 반드시 달려올 것이다. 즐겁게 일하고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충현서원의 관감당(觀感堂)은 인조가 ‘이원익의 충심을 보고 느꼈다 하여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라’는 뜻의 당호이다. 

1634년 1월에 이원익은 별세하였다. 1634년 1월 29일자 <인조실록>에는 그의 졸기(아래 내용)가 실려 있다. 

“전 의정부 영의정 완평부원군 이원익이 졸하였다.
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관서(關西)에 두 번 부임했었는데 평안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조조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 영창의 옥사(獄事)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적신 이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원익이 광해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홍천으로 귀양 보냈는데,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상이 반정(反正)하고 나서 맨 먼저 그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고 매우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가 연로하였으므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편안하게 하였고 또 흰 요와 흰 옷을 하사하여 그의 검소한 것을 표창하였다. 1624년  변란(이괄의 난)때 체찰사로서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15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총독군문으로서 세자를 전주까지 배행하였는데, 조야가 모두 그를 믿었다.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 87세였다. 

상이 관(棺) 1부(部)를 하사하라 명하고 예조 낭청과 경기 감사를 보내어 금천에 가서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며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 뒤에 종묘에 배향하였다.”

오리 이원익. 그는 청렴하고 안민(安民)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오리 서원. 사진=김세곤 제공
오리 서원. 사진=김세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