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설 한국좋은일자리연구소장/경제학 박사
윤기설 한국좋은일자리연구소장/경제학 박사

정부가 어제 내놓은 ‘근로시간 개선 방안’은 지난 3월 입법예고안 보다 후퇴해 맹탕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8개월 작업해 내놓은 정부의 보완책은 ‘필요한 업종·직종에 한해 노사가 원하는 경우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이것도 노사정 대화를 통해 세부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어서 근로시간 개편의 대폭 후퇴가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호랑이’를 그리려던 노동개혁의 틀이 ‘고양이’로 쪼그라들 판이다.

정부는 지난 6월부터 3개월간 근로자·사업주·국민 60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보완책을 마련했다. 이 조사에서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하는 방안에 대한 동의(46.4%)가 비동의(29.8%)를 앞섰다. 52시간제 유연화의 필요성에 국민 다수가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일부 업종·직종에만 국한하자는 안에 대해서는 찬성 비율(54.4%)이 반대(23.9%)보다 월등히 높았다. 업종별, 직종별로는 제조업과 건설업, 건설·채굴직과 연구·공학 기술직에서 개편 요구 비율이 높았다. 제조업, 생산직 등에 한해 ‘주 최대 60시간 이내’ 한도로 완화하는 안이 만들어질 것이란 분석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문제는 근로시간 유연화의 핵심인 월, 분기, 반기, 연 단위가 슬그머니 사라진 점이다. 현행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연장근로 단위 선택을 노사정 사회적 대화로 떠넘긴 것이다. 

현행 주 52시간제는 너무 경직적이다. 한 주라도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면 불법이 된다. 이를 유연화해 일이 몰리는 주나 월에는 52시간을 초과해 일하고 일이 없는 주나 월에는 그만큼 더 쉬자는 게 근로시간 개편의 핵심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주 52시간제로 인한 생산활동의 어려움을 추가인력 채용을 통해 대응했다는 비율이 36.6%에 이른 것은 유연한 근로시간제가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보여주는 통계다. 그런데 이번에 내놓은 개편안은 훨씬 경직돼 인력난을 겪는 기업들의 생산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 시 1주일 상한 근로시간으로 ‘60시간 이내’라고 응답한 근로자가 75.3%에 달한 것은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근로시간제도 보완이 얼마나 단선적이고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60시간 이상 장시간근로를 원하는 근로자는 중소기업 소속 저임금 근로자들이 대부분이다. 임금이 많고 근로시간이 짧은 ‘부자노동자들’은 장시간근로를 원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조사결과를 발표하기전부터 여론조사를 토대로한 근로시간 제도 보완은 개혁의 후퇴를 의미할 뿐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론조사 결과를 개혁방안에 반영한다는 것은 정부의 안이하고 무책임한 행정의 표출에 다름아니다.

사실 정부가 당초 발표했던 주 최대 64시간안은 기업들의 탄력적인 근로를 가능케할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개편안이란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데 일부 언론과 노동세력이 ‘주69시간 장시간근로’라는 프레임을 씌워 정부안을 공격하면서 당초 개편안에 손질을 가했고 다시 만든 개편안은 ‘맹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근로시간개편안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완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겠다고 했다. 한국노총도 마침 사회적 대화기구에 복귀해 노사정간 논의에 머리를 맞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를 통한 개혁안은 더욱 뒷걸음질칠 것으로 보인다. 개혁의 당사자인 노동계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개혁방안에 대해선 선뜻 양보나 합의를 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직된 근로시간 개편을 통해 노동 효율성과 경제 활력을 높이는 건 국가경쟁력과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런데 근로시간 개편안이 한차례 후퇴한데 이어 또다시 사회적 대화를 통해 변질된다면 기업의 인력운용을 탄력적으로 하고 근로자들의 자유로운 근로선택권을 넓히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노동개혁이 유명무실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