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초로의 남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한 손에는 조리도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식재료를 쥐고 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빛나며, 피부는 약간 주름진 모습이다. 요리하는 동안 언제나 주방을 깨끗하게 유지한다. 압력밥솥에 밥을 안쳐서 가스 불에 올리고, 고기 굽고 채소 씻는 모습이 진지하다. 가끔은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보려고 애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와 함께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내가 주방을 접수한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은퇴 직후 아내가 “나, 이제 밥하기 싫어!”라면서 부엌 은퇴를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과 저녁 두 끼는 내가 챙긴다. 대신에 설거지는 아내가 한다. 아내가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도 있지만, 그 경우는 손자들 먹거리를 챙기거나 주말에 아들 딸 부부가 올 때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그럼 어떻게 하나. 은퇴한 남자들에 대한 블랙루머가 유행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아내에게 눈 똑바로 뜨고 밥 달라고 하는 ‘간 큰 남자 시리즈’부터 은퇴 후에 하루 세끼를 챙겨달라고 하는 ‘삼식이 시리즈’까지 … 너무 무섭지 않는가? 어디 감히 밥 달라고 소리 치고, 밥상 앞에서 반찬 투정을 할까.

예전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로 떠나간 후 아내가 혼자 밥을 먹었던 장소가 이제는 은퇴한 남자들의 차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점점 남성화 되어가는 아내들의 잦은 외출 때문이다. 아내가 외출하는데 감히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겠는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황량한 은퇴생활의 어려움 중에 혼자 밥 먹는 일만한 게 또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찾아오는 것이 남녀 간 성격의 교차변화다. 집안일을 하던 여성은 바깥으로 나돌고, 집에는 관심이 없던 남성은 “오늘 밥상은 또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을 한다. 노년기에 나타나는 성격 변화로서 여자들은 공격성, 자기주장, 권위주의 성향이 높아진다. 자칫 대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심리학자 존 그레이(John Gray)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모여서 위로하는 것이 금성의 규칙이고, 힘들면 동굴에 들어가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화성의 규칙이라 했다. 금성의 규칙은 여성의 성격, 화성의 규칙은 남성의 성격을 말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화성에서 왔던 남자는 금성으로 가고, 금성에서 왔던 여자는 화성으로 간다. 여자들은 얘기가 줄어드는 반면에, 남자들은 말이 많아진다.

5년이 지난 냉동갈치, 냉동굴비의 맛을 아는가? 현직에 있을 때 선물로 받은 생선을 아내가 냉동실 안쪽에 꽁꽁 묻어뒀다. 아마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먹으려고 냉동실에 넣어뒀다가 뒤로 밀려나서 그리되었던 것 같다. 아까워서 못 버리고 조리를 해보지만 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쓰서 못 먹는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크게 한방이 들어오니 혼자 중얼거린다.

냉장고에서 물러버린 채소, 부패한 식재료를 잔소리 안하고 버리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내는 자신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싸다놓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서로 기호식품이 달라서 그런 특식에는 내가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아내의 당당한 표정에 마지못해 동의한다.

왜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렇게 시시하고 신통찮게 변해 가는가? 이것이 진정 나이 탓인가?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 아들과 사위는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육아도 하고, 그리고 회사도 다닌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상상도 못했는데 당연한 듯 해나간다. 나이 먹으면서 일어나는 남녀 간 성격의 교차변화가 아니라 세태변화일지도 모르겠다.

수명도 길어지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역전의 기회가 올지 어찌 알겠는가? 슬프다 생각 말고, 그냥 건강한 식탁이나 차리자! 음식은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한다. 봄에는 산과 들에 산야초가 지천으로 돋아나고, 여름에는 땅속에서 튼실한 뿌리채소가 나오며, 가을에는 가지가 휘도록 과일이 열리고, 겨울에는 거둬둔 곡식이 있어 걱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