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6일 국회에서 만났다. 지난달 17일 이후 19일 만이다. 혁신위 활동 전반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혁신위가 강력한 의지를 담아 제시했던 당 지도부, 중진, 친윤의 불출마 또는 험지출마 안(案)에 대한 양측의 입장 차도 여전해 보인다. 5분간 공개하고 15분간 비공개로 대화를 나눴다는데 사안의 중요성으로 미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겠다.

인요한 혁신위 완주할 수 있을까

①두 사람 공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적어도 큰 변화를 가져올 만한 대안을 준비하지 않은 채 상대의 양보만을 기대하며 만난 회동이었다. 그 기대가 무산됨으로써 더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어졌다.

②김 대표가 “지도부의 혁신 의지를 믿고 맡겨 달라”고 한 말을 인 위원장이 ‘희망적 시그널’로 인식했을 수 있다. 당 지도부가 마지막 순간에 자기희생적 결정을 할 것이라고 예감하게 했을 법도 하니까.

③혁신위 활동 결과를 최종보고하면 당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측이 윈윈하는 장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입장을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지도부 등의 불출마 또는 험지출마 요구는 김 대표의 결심에 맡기는 선에서 양해가 이뤄졌을 수 있다. 전날 있었던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의 비공개 오찬의 분위기가 인 위원장에게도 전달됐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라면 인 위원장이 혁신위원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④같은 맥락이지만, 감 대표가 주류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문제는 공관위가 구성되면 거기서 특정인 배제 방식이 아니라 시스템 공천의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을 개연성이 있다. 인 위원장이 그 진정성을 믿어보기로 하고 한 걸음 물러섰을지도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크게 봐서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①의 경우였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인 위원장은 “오늘 만남을 통해 김 대표의 희생·혁신 의지를 확인했다”고 덕담을 하긴 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당 대표실을 떠나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그게 실망의 표현이었다면 오늘 열릴 혁신위 회의에서는 존폐가 논의될 수도 있다. 인 위원장으로서는 지도부, 유력자들의 자기희생 약속을 받아내는데 실패한 상태에서는 위원회를 더 끌어갈 명분이 없다. 혹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 희생은 각오하고 있다는 정도의 언질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인 위원장이 그걸 양해하는 순간 그의 신뢰성은 곤두박질치고 만다.

‘전권부여’로 기대치만 높여 놓고 

김 대표는 아주 살갑게 인 위원장을 추켜세우고 격려하고 하면서 친애의 정을 과시한 모양인데, 이건 립서비스 외엔 더 줄 것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사실 그는 인 위원장에게 이미 아주 심한 모욕을 안겼다. 인 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주류 희생’을 지도부가 의결하지 않을 경우 자신을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추천해달라고 한 인 위원장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다. 그런 다음 기자들에게 “그간 혁신위 활동이 공관위원장이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회 상황이 매우 엄중한데 공관위원장 자리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는 것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못 하겠으면 내가 하도록 해달라”는 뜻으로 한 말을 “혁신위 이끌었으니 공관위원장 자리 달라”는 뜻으로 전한 것이다. 제대로 망신을 준 셈인데, 두 번째 회동에서는 “혁신을 성공시키기 위한 충정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충분히 공감한다”며 표정을 바꿨다. 인 위원장이 도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이 임명한 혁신위원장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국민의힘의 혁신 노력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있다. 김 대표는 혁신위에 ‘전권부여’를 약속했다. 그러다가 지도부의 자기희생을 요구받자 말이 달라져 버렸다. 국민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놓고 슬그머니 발을 빼버린 격이었다. 당의 개조를 절박한 과제로 인식했다면 혁신위 말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어야 했다. 최고위원회 하위조직으로서 혁신위를 띄운 것은 ‘하는 척하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는 인식을 주기에 족하다. 
물론 김 대표 나름의 입장과 사정도 있게 마련이다. 

“제안한 안건들은 당의 혁신과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만 최고위에서 의결할 수 있는 사안이 있고 공관위나 선거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할 일이 있어 바로 수용하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 달라. 긴 호흡으로 지켜봐 주면 혁신안을 바탕으로 국민의 뜻을 받들고 이기는 국민의힘이 되겠다.”

더 누렸으면 양보할 줄도 알아야

김 대표가 인 위원장에게 한 말이다. 최고위원회가 모든 문제에 배타적 권한을 가진 기구는 아니다. 당헌당규에 따라야 할 일도 있다. 게다가 총선인 만큼 ‘전략적 고려와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약속의 신뢰성이다. 당원과 국민의 기대를 멀리 비켜가는 결정을 한다 해도 직접 책임을 물을 방법이 만만찮다. “유권자가 표로써 심판할 것이다”라는 게 모범답안이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엎질러진 물이 된 다음에 책임 추궁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이긴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겠다. 패배할 경우 정계은퇴로 책임지겠다.”

김 대표는 지난 10월 15일 긴급의총에서 그렇게 말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의총이었다. 그런데 이는 하나마나한 말이었다.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에서 다시 민주당에 지면 정권 재창출의 꿈은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패배 후에 김 대표가 정계를 은퇴하든 말든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혁신위에 대한 약속도 그래서 믿음이 덜 간다고 할 수밖에 없다.

김 대표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서, 그러니까 공천 마무리단계 쯤에 당의 유력자들이 자기희생을 실천하는 극적 퍼포먼스를 해 줄 것이라는 언질이나 예감 같은 것이라면 기대해 볼만도 하다. 물론 국민 사이에 혁신의 요구가 높아지는 이 시기에 선제적 혁신조치를 잇따라 내놓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국민으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남보다 더 나은 여건, 더 유리한 지위를 누려왔으면서도 자신의 희생은 한사코 마다하는 사람에게 한국정치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당 대표 한 사람의 사법리스크 회피 혹은 완화에 소속 의원들이 총동원되는 극단적 사정치(私政治) 집단과 닮은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총선 한 번으로 정치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