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국민의힘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할 모양이다. 의원총회, 당협위원장 연석회의, 상임고문단 회의를 차례로 열어 논의한 결과가 그렇다고 알려졌다. 비주류 측에서 비대위원장보다는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는 게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애초부터 ‘한 비대위원장’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한 장관이 와서 잘하면 대박, 아니면 쪽박이다. 용산과 각을 세우거나 당내 팀워크를 다지며 할 말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 대박이 날 가능성이 있다. 한 장관의 개인 능력과 참신함은 훌륭하지만, 연말연초 쌍특검 등 민주당 프레임에 걸려들어 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집 나간 중도와 청년층에 한 장관이 소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위기의 늪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

“한 장관을 더 아껴서 선거대책위원장 등을 맡겨야 한다.”

“한 장관은 훌륭한 국민의힘 자산이다. 초기에 이렇게 (정치에) 등판을 하면, 상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비대위원장 추대를 반대하는 측의 논리다. 레토릭은 같더라도 내심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정말로 한 장관을 아끼는 경우다. 대선 주자로 내세워야 할 사람을 너무 일찍 노출시켜 상처라도 입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한 말일 수 있다. 반대로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한 장관이 바로 당의 지휘봉을 잡는 데 대한 거부감의 표현일 것 같기도 하다. 정치를 오래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듯하나 대세는 ‘추대’다. 

“‘당이 지금 이순신 장군 상황처럼 배가 열두 척만 남은 상황인데 한 장관을 아낄 게 뭐 있느냐’는 의견이 많았다”(유흥수 전 의원, 조선일보, 12. 20).

이 한마디가 국민의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외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 일찍 등판했다가 역량 발휘를 못하거나, 이미지에 상처를 입게 될 우려가 영 없지는 않지만 당장 급한 것은 내년 4‧10총선이다.  그 선거에서 지면 윤석열 정권은 그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레임덕에 빠지고 당은 존립의 위기에 직면한다. 총선 이후를 위해 인재와 화력(火力)을 비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기고 나서야 훗날도 있고 다음기회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한동훈’이라는 대안이 생겼다. 물론 다른 유능한 인사들도 있지만 적어도, 총선 국면에 스타성 참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는 한 장관이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한 장관에게 지휘봉을 맡기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당 구성원 대다수가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한동훈 비대위’ 하나뿐이다. 선대위원장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당에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은 이후의 일이다. 

모든 길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

사실 이는 당 측이 수용하느냐마느냐가 아니라 한 장관이 수락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해야 옳다. 당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시피 하지만 한 장관은 그렇지 않다. 지금 피하고 다음에 대선을 겨냥할 수도 있다. 정치를 하지 않고 행정부에서 중책을 계속 맡는 길도 있다. 아직은 젊으니까 다른 행로를 선택하지 못하란 법도 없다. 개인적인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추대해주면 그 자리를 맡겠다고 용의를 보인 데 대해 당 측은 다행으로 여겨야 옳지 않을까?

“정치인으로서의 등판이 너무 빠르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이 CBS에 나가서 한 말이다.  

“앞으로 뭐를 가지고 당을 끌고 갈 거냐 하는 비전을 제시한 바가 없다, 정치라고 하는 것이 간단한 논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등판하는 것이 과연 본인의 미래를 위해서 현명한 판단이냐 아니냐 하는 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는 이런 조언도 했다. 아직 제의도 없었고 따라서 수락여부를 말할 계제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비전을 어떻게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한 장관이 비대위원장으로 가봐야 이렇다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그러면서 한 장관 개인을 걱정하는 듯한 말을 덧붙였다(이쯤 되면 횡설수설이다). 선대위원장‧비대위원장직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그 전신들을 포함)을 오가며 두루 거친 인사의, 시니컬하게 들리는 이런 논평은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특히 국민의힘에 가서는 ‘총선 참패’, ‘대선 선대위 해산’만 경험하지 않았는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한 장관은 의연하고 당당하다. 그는 19일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갔다가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정치경험이 없다’는 지적에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의 작가, 사상가 루쉰의 단편 ‘고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다만 엘리트주의 스스로 경계해야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이만한 자신감이면 집권당 비대위원장의 소임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진짜 위기는 경험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과도하게 계산하고, 몸 사릴 때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인식과 각오야 말로 위기에 처한 집단에 요구되는 리더십이다. 

그는 “민주당에서 윤석열 대통령 아바타라는 비판이 나온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대해 자신은 누구도 맹종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주로 그런 이야기를 민주당에서 하는데, 자기들이 이재명 대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절대복종하니까 남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반문하기도 했다. 이미 임전태세가 갖춰졌다는 말로 들린다. 새 선장이 정해진 이상 출항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같은 날 민주당의 박찬대 최고위원이 “국민의힘은 차라리 검찰당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공격했다. 검사 출신인 한 장관이 여당의 비대위원장이 되는 것에 대한 견제인 셈인데 ‘되로 주고 말로 받기 딱 좋은’ 공격이다. 그 민주당은 다양한 전과에다가 갖가지 범죄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거나 수사를 받고 있는 인사를 당 대표로 앉혀두고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차라리 ○○당으로 이름을 바꾸라”는 식의 반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민주당의 입법 농단, 탄핵 및 특검 남발 행태를 보면, 당 대표 구출을 위한 빅딜(?)을 정부‧여당 측에 압박하는 인상까지 준다. 이것이 국민의힘 새 지도체제가 우선적으로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다. 당직자, 당 소속 의원, 당원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발적 능동적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한동훈 비대위’는 성공할 수 있다. 다만 엘리트주의의 유혹은 스스로 경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