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얼마전 벌어진 한국타이어테크놀로지 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보노라면 돈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타이어라는 산업도, 테크놀로지라는 가치에 대한 성찰은 하나도 없고 오직 골육상쟁의 모습만 있었다. 형제간, 부자간, 남매간의 싸움이 등장했다. 전직 대통령의 집안이니 정경유착, 사직당국의 수사를 받았으니 횡령탈세, 여기에 아버지를 정신감정하고 사모펀드가 등장하고 하다 못해 공익법인까지 들먹였다. 출생의 비밀만 덧붙이면 완벽한 막장 드라마가 된다. 드라마 작가야 재미있게 보겠지만 이를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 가슴에는 반기업 정서만 쌓인다.

기업이 이러면 경제단체라도 가치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기업은 그 좌표를 제대로 찍고 있는지,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얼마 전 어느 대기업 회장에게서 들은 전경련 회장단 회의의 일화가 있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는 경제현안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 이슈도 가끔 보고를 하는데, 그날은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진보 정부라 재계에는 정부에 대한 비판적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사무국에서 준비한 자료는 정부 정책을 조목조목 까놓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위는 한참 낮았고 속기록이 나간다 해도 문제 될 게 없는 그저 그런 토론만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화장실에서 참석자 중 한 명을 만났는데 그는 잔뜩 볼멘소리로 오늘 회의에 괜히 왔다고 했다. 경제 얘기를 해야지 왜 다른 얘기를 하나 이게 새어나가면 어찌 되겠냐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이 회장은 상당히 의아해했다. 이 정도도 감내 하지 못하면 기업이 어디에 의존하나? 이런 일 하라고 경제단체가 있는 것인데 그러면서 평소 뭘 아는 체하며 나서기 좋아하는 그 회장의 안목과 식견에 실망했다고 했다.

기업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고, 그 사회가 주는 토양 위에서 기업활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당대가 아니어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기업 하기 좋은 토양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를 듣고는 새삼 재계의 지도자가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역대 전경련 회장들은 척박한 환경하에서도 할 말을 했다. 정주영 회장은 정치자금을 뜯기다 못해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정치는 4류라고도 했다. 최종현 회장은 업종전문화 정책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도 했고, 김우중 회장은 500억 달러 흑자가 불가능하다는 장관을 향해 대통령 면전에서 그러면 뭣하러 장관을 하느냐고 쏘아댔다. 그들이라고 입 다물고 사는 게 편하다는 걸 몰랐겠나, 당대에 이만큼 벌었으니 다음 대는 될 되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뒀는가? 그들은 모두 고초를 겪었다. 선거에 패한 정주영 회장은 호된 보복을 당했고 이건희, 최종현 회장은 본의 아닌 사과를 해야 했다. 김우중 회장은 하다 못해 자신의 기업이 해체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런 입바른 소리들이 경제에는 쓴 약이 됐고 건전한 정치, 사회환경을 조성하는데 큰 보탬이 됐다. 그 덕에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고 다음 세대는 세계적 기업을 경영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오픈 AI(인공지능)를 둘러싼 경영권 다툼은 부럽기만 하다. 인공지능 기술개발에 대한 부머(효율적 가속주의)에 맞서는 두머(효율적 이타주의)라는 가치의 논쟁이 시가총액 130조 원의 회사에서 경영권 다툼으로 일어났다. 그 이전에도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청원이 있었다. 놀랍게도 이 청원은 워렌 버핏, 빌 게이츠 등 부호들이했다. 이들은 상속세 폐지는 도쿄 올림픽(1964) 메달리스트의 자제들이 LA올림픽(1984) 국가대표로 자동 선발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려운 얘기를 참 쉽게 설명했다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우주개발을 둘러싼 일론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와 제프 베이조스 블루오리진 소유주간의 격렬한 토론도 있었다.

우리 기업의 오너들이 돈을 놓고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미국 기업의 오너들은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하고 이를 통해 인류의 발전을 견인해 왔다. 아무런 비전 없이 막장드라마로 치닫는 한국 기업을 보면 우리 사회가 과연 이런 기업을 위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가 의문이 든다. 경영권 분쟁을 겪는 기업들은 이런 유혹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를 살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