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할아버지, 가~ 푸우.”
“그래, 알았어. 간다~~”

화내는 손자에게 내가 쿨하게 맞대응 한다. 그러면 곧 “할아버지, 가지마~~”하면서 다리를 잡고 매달린다. 이렇게 빨리 꼬리 내릴 걸 그렇게 성질을 부렸나 싶어 꼭 안아주면 손자는 곧 흥분을 가리 앉히고 헤헤 웃는다.

나무 심어 십년은 잠깐이라더니 쌍둥이 손자 자라는 걸 보면 금방이다. 꼬물꼬물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장난질을 처댄다. 큰놈은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감성적인 아이다. 음악에 맞춰 춤출 때는 리듬 박자감 다 좋고 표정도 그럴싸하다. 지나가는 길에 빵가게만 보이면 뛰어 들어가 사달랜다. 그래서 내가 붙인 별명이 ‘빵우’다. 작은놈은 언어와 사고능력이 뛰어난 똑똑한 아이다. 할머니가 붙인 별명이 ‘차도남’이다. 차가운 도시남자. 마시는 걸 좋아하는 것이 꼭 나를 닮았다.

오후 4시에 어린이집 퇴원하면 6시 넘게까지 바깥에서 논다. 자기네 집 아파트단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몇 바퀴 돈다. 놀이기구도 타지만 정원수 아래 풀숲을 헤치고 다니기 일쑤다. 작은놈 은우는 형에게 “선우야, 그르면 안 돼!” 해놓고 자기도 곧 따라한다. “그만 놀고 이제 가자” 하면 손을 내밀어 검지를 세우고 “한땅 한땅!”이라고 외친다. ‘한번만 더’라는 뜻이다.

자기네 집에 대려가 목욕시키고 저녁밥 먹여서 퇴근한 아들 며느리에게 인계하고 나면 8시가 넘는다. 집으로 돌아올 때 시원한 맥주한잔 먹으면 기분이 좋다. 손자 돌보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몫이 자연스럽다. 아내와 나는 맡은 임무를 그냥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직장생활을 하고, 그것이 그들 몫이다. 손자들의 몫도 있다. 별 탈 없이 잘 자라주는 것. 우리 집안은 각자 자기 몫을 하고 사는 셈이다.

“너희들은 부자 할머니 만나서 참 좋겠다!”
나는 가끔 손자들에게 샘이 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태어나기 이미 오래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으니 조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없었다. 아무튼 아내는 손자들 먹거리, 옷과 신발, 장난감 등등을 사기 위해 ‘1일 2쿠팡질’은 보통이다. 참 좋은 세상이다. 손가락 한 번 까닥하면 다음날 새벽 문 앞에 물건이 도착해 있으니 말이다. 아내는 쌍둥이 손자 돌보는 데 지극정성이다. 하기야 삶이란 그 무언가에 정성을 쏟는 일 아닌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희망을 심는 일이다. 산과 들에는 나무가 우거지고, 마을에는 어린아이가 득시글거리면 좋겠다. 이 나라의 주춧돌과 대들보가 무럭무럭 자라났으면 좋겠다. 세상을 만드는 근본은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무슨 돌개바람이 불었는지 아이를 잘 낳지 않는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는다.

내가 젊었을 때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표어가 유행했다. 입 하나 늘면 걱정 하나 더 느는 빈곤한 시절의 이야기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이제는 입에 풀칠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다. 경제를 비롯한 종합국력은 G7 국가와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출산율은 왜 세계에서 거꾸로 1등을 달리는가? 자식 낳아 키우지 않으면 세상일은 누가 하나? ‘독거 인간’만 득실거리다가 사라져버리는 세상, 좀 무섭지 않는가?

요즘 젊은이들은 살면서 이상하게도 이기심만 키운듯하다. 나 혼자 잘살려 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나이든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못 도와주니 자식은 하나만 낳든지 아예 낳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르면서 집집마다 개는 키운다. 길거리 걷다보면 어린아이 안고 다니는 사람보다 강아지 끌어안고 다니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게 무슨 요지경 세상인가? 개인의 자유는 소중하지만, 개인주의가 폭주하면 공동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저 출산! … 무슨 경을 외워 이 바람을 잠재울 수 있을까?